집 앞에서 기다리던 포졸들에게 체포되는 이호영 성인과 누나 이 아가타.(탁희성 작) 가톨릭신문 자료 사진
이호영(베드로) 성인은 회장으로서 성실히 신앙생활을 하다 103위 성인 중에서 가장 먼저 순교했다.
성인의 이름은 103위 한국순교성인 호칭기도에서 성 김대건(안드레아), 성 정하상(바오로) 다음에 불린다. 기해박해의 시작과 함께 체포돼 순교했기에 103위 성인 중 순교한 날이 가장 빠르기 때문이다.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난 성인은 부친이 대세를 받고 선종한 뒤 누나 이 아가타와 함께 서울로 이사해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성인은 성실한 신앙생활로 당시 입국해 사목하던 유방제 신부의 눈에 들었다. 유 신부는 성인이 젊은 나이임에도 성실하게 교회의 일을 수행하는 것을 보고 그를 회장으로 임명했다.
회장직을 수행하던 성인은 어느날 과거에 급제하는 기이한 꿈을 꿨다. 잠에서 깬 성인은 ‘아마 치명을 하려나보다’하는 생각을 했다. 성인에게 순교는 과거급제보다 훨씬 기쁘고 영광스러운 일이었던 것이다.
꿈을 꾸고 몇 달이 지난 1835년 2월, 성인의 집 문 앞을 지키고 있던 포졸들이 그를 체포했다. 성인 남매의 신앙생활이 널리 알려졌기에, 포졸들은 박해가 시작되자 가장 먼저 성인의 집에 들이닥친 것이다.
성인은 수없는 배교 강요와 고문에도 불구하고 신앙에 반하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형리들은 “만일 말로써 천주를 배반하기 싫거든 글자 하나를 써줄 테니 점 하나를 찍든지, 침을 뱉든지 하면 배교로 인정하고 놓아주겠다”고 유혹했다.
하지만 성인이 “만 번을 죽어도 그렇게 할 수 없다”고 거절하자 더욱 극심한 형벌을 가했다. 무수한 매질과 고문으로 팔이 부러지고 정강이뼈가 활처럼 휘었을 뿐 아니라 살점이 해져 뼈가 드러날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고통 속에서도 성인은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고 한다.
마침내 성인은 사형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사형이 집행되기도 전에 고문으로 생긴 상처가 심하고 병이 깊어 기력이 쇠약해졌다.
성인은 “칼 아래 치명하는 것이 원이었지만, 주의 명이 아니면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면서 숨을 거뒀다. 때는 1838년 11월 25일, 성인의 나이 36세의 일이었다.
■ 성인 발자취 만날 수 있는 곳-단내성가정성지
단내성가정성지(경기도 이천시 호법면 이섭대천로155번길38–13)는 이천에서 태어난 성인을 현양하는 성지다. 성지는 성인의 삶과 신앙, 순교를 현양하며 순교비 등을 조성해 성인을 현양하고 있다.
※문의 031-633-9531 단내성가정성지, www.dannae.or.kr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