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 예수님.
지난주에 우리는 바오로 사도께서 사용하신 ‘영(프네우마)’이라는 단어의 쓰임을 찾아보면서 ‘영성’이라는 말이 왜 기본적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에 바탕을 둔 용어인지 살펴보았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는 ‘영적 인간’의 삶의 방식을 놓고 보면, ‘영성(영-썽)’이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영적인 것’을 가리키는 것이고, 이 ‘영적인 것’은 자연스레 ‘하느님의 성령’을 의미한다는 것, 따라서 ‘영성 생활’이라는 것은 주님의 영과 늘 함께하는 생활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죠.
그런데 ‘영성’이라는 말을 이렇게 알아듣더라도 여전히 뭔가 아쉬움이 남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이야 당연히 영성을 하느님과 연결된 것으로 생각하지만, 다른 종교나 일반 사회에서 쓰는 ‘영성’ 용어는 하느님과 관련이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영성’이라는 것을 우리는 또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저는 영성을 우리 ‘삶의 원리’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하느님의 성령을 따르는 영적 인간의 삶의 방식이 근본 원리인 것은 당연하지요. 하지만, 다른 종교나 사회에서 쓰는 ‘영성’이라는 말은 반드시 하느님과 연관되지는 않더라도 그들 나름의 삶의 원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후에 다시 말씀드리기로 하고, 그럼 어떻게 영성이 삶의 원리가 되는지에 대해서 한 번 살펴볼까요?
이를 위해 다시 한번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들어봅니다. 사도께서는 테살로니카 전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평화의 하느님께서 친히 여러분을 완전히 거룩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여러분의 영과 혼과 몸을 온전하고 흠 없이 지켜 주시기를 빕니다.”(1테살 5,23)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죠. 그런데 사도께서는 왜 ‘여러분’을 지켜 주시기를 빈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굳이 ‘여러분의 영과 혼과 몸’이라고 구별해서 말씀하셨을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영’과 ‘혼’, ‘몸’의 구별을 이야기하는 ‘삼분법적 인간학’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몸의 차원’입니다. 우리 모두는 육신을 지니고 있죠. 눈으로 볼 수 있고 또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차원입니다. 다음으로는 ‘정신의 차원’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일부를 이루고 있으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차원인데, 우리는 이러한 차원을 ‘정신’ ‘마음’ 또는 ‘영혼’이라고 부릅니다. 몸의 차원이 됐든 정신이나 마음, 영혼의 차원이 됐든 이러한 부분들은 모두 우리 존재의 ‘인간적인 부분’들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영의 차원’은 인간적인 부분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이 인간 안에 머무르는 차원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영으로 인간을 창조하시고(창세 2,7 참조) 또 예수님을 통해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심으로써(요한 16,7-14 참조) 우리 안에 하느님의 영이 머무시는 자리가 바로 ‘영의 차원’입니다.
이 세 가지 차원을 세 개의 동그란 원으로 생각해보면 이해하기가 더 쉽습니다. 가장 밖에 있는 커다란 동그라미가 몸의 차원이라고 한다면, 이 안에 조금 더 작은 동그라미, 곧 정신의 차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번째 동그라미 안에 다시금 가장 작은 동그라미, 곧 영의 차원이 있는 것이죠.
이 각각의 차원들은 다 저마다의 원리가 있습니다. 몸의 차원의 원리는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죠. 예를 들어, 오늘 바쁜 일이 있어서 아침 점심을 굶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되죠? 배가 고프겠죠. 그리고 배가 고프면 우리는 당연히 뭔가를 먹어야 합니다. 만약 어젯밤에 잠을 설쳤다면 오늘 우리는 피곤함을 느낄 테고, 그러면 우리 몸은 쉴 시간을 찾게 됩니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몸의 차원에서 움직여지는 원리입니다.
정신의 차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는 다른 사람에게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고 또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들이 채워지지 않을 때 우리 마음은 상처를 입게 되고, 때로는 화나 시기, 질투 등을 경험하게 되죠. 정신의 차원에서 움직여지는 원리입니다.
그렇다면 영의 차원의 원리는 무엇일까요?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시는 ‘성령의 인도에 따르는’ 모습이 바로 영의 차원에서 움직여지는 모습입니다. 몸의 차원이나 정신 차원의 원리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의 영께서 이끌어주시는 모습인 것이죠.
몸의 차원이나 정신 차원의 원리들은 쉽게 이해가 되지만, 영의 차원의 원리가 무언지는 감이 잘 안 잡히시죠? 당연합니다. 영의 차원의 원리를 보다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은 좁은 의미의 ‘기도’ 안에서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생활을 깊이 하고 계시는 어느 자매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신 적이 있습니다. “가만히 기도를 하고 있다 보면, 당신 안에서 하느님의 영께서 움직이시는 모습을 보게 된다”는 거죠. 그럼 기도라는 것이 내 스스로 해나가는 어떤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이 내 안에서 움직이시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시간이 된다는 겁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로마 8,26)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아주 잘 이어지는 말씀이죠.
아직도 감이 잘 안 잡히신다고요? 그럼, 좁은 의미의 기도가 아닌 넓은 의미의 기도, 곧 우리 삶에서도 이 원리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아무리 따져 봐도 이치에 맞지 않고 상식에도 맞지 않는 행동들을 할 때가 있습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누군가를 아무런 조건 없이 용서한다거나, 내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는데도 누군가에게 내 시간이나 돈을 나누어 주는 행위 등이 그렇습니다. 이런 일을 하고 나서도 스스로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지?’ 하며 신기해하고 기특하게 생각하는 체험들이죠. 순교자나 성인들의 위대한 행적이 꼭 아니어도, 우리 삶의 작은 부분들에서 체험되는 이러한 것들이 바로 영의 차원의 원리를 따라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이렇게 우리 인간을 몸의 차원, 정신의 차원 그리고 영의 차원을 지닌 존재로 바라보는 것이 바로 바오로 사도에게서 찾을 수 있는 ‘삼분법적 인간학’의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나’라는 한 사람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이 각각의 차원들은 서로 어떻게 움직이고 있으며 또 어떻게 그 삶을 이끌어갈까요?
민범식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서품을 받았으며 로마 그레고리오대학에서 영성신학 박사와 심리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