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나는 문이다」라고 했다가 곧 이어「나는 착한 목자이다」라고 하신 것이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요한 복음서에서 쓰여진 유명한 일곱 번의「나는……이다」라는 표현은 당신의 신성(神性)을 사람들의 생명가 관련시켜 말하는 필요에 따른 표현이다.
여기서는 양과의 관계를 들어 신성과 인성의 만남을 이야기하므로 양의 안전과 생명보호를 신성으로 보장하는 안전한 문이며 인도하는 목자라는 뜻이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라고 할 때「착한목자」의 영상은 자기 양을 보호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희생적인 사랑으로 표시되었다. 이 착한 목자상을 예수의 최후순간이 임박했을 때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목자가 죽임을 당할 때 양떼가 흩어질 것이라는 즈가리야서의 예언이 인용되었고(마르 14, 27)베드로에게 정녕 주님을 시랑하느냐고 세번이나 다짐을 받을 때 역시 세 번씩이나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라고 당부하실 때 강조되어 있다(요한21, 15~19).
착한 목자의 양에 대한 사랑은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 헤매는 착한 목자의 비유(루가15, 1~7 마태18, 12~24)에서 여실히 드러나 있다. 예수께서 왜 당신을 착한 목자로, 백성을 양떼로 비유하셨을까. 그것은 구약성서에 그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백성이 팔레스티나 땅을 정복하고 성조들의 공동생활은 주로 목축생활이었고 따라서 양들이 재산목록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양떼를 잘 돌보는 목자상은 대단히 귀중하였다.
그 후 그들의 생활이 농정으로 돌아선 후에도 목축에 대한 애착은 상당히 강력하였다. 야훼는 가끔 포도원지기, 씨뿌리는 농부로 비유되기도 하지만 양떼를 치는 목자로 그려지는 것이 더 친근미가 있었다.
성군들과 모세, 다윗은 하느님의 백성을 이끄는 지도자로서 목자로 표현된다. 모세는 이사야서 63장11절에서 양의 목자로 나타나 있고 시편78장70~72절에는 다윗이 목자로 불리면서 다윗의 후예 메시아가 목자로 나타날 것을 예언하고 있다. 다윗이 목자로 불리는 것은 에제키엘서 37장24, 미가5장2에서 찾아 볼 수가 있다. 이와는 반대로 백성들을 잘 못 다스리고 폭군으로 임하는 제왕들을 못된 목자로 성서에는 그려져 있다(예레2, 8 : 10 20 : 12, 10즈가11, 4~9).
오늘의 대목에서 예수를 착한 목자로, 반대자들을 삯꾼 양치기로 묘사하는 요한 복음서 10장은 특히 에제키엘서 34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여기서 하느님은 못된 양치기들, 즉 폭군들이 자기 백성을 돌보지 않고 그들을 착취하며 약한 이를 멸시하고 병든 이와 길잃은 이들을 내버려두는 양상을 고발하신다. 『그들은 목자로서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양들을 흐트러뜨리고 사나운 맹수들의 먹이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내 양들은 세상 사방에 흐트러졌고 이 양들을 찾아 모으려는 자 아무도 없다』라고 한탄하셨다. 이에 하느님은 몸소 이 고약한 목자들에게서 당신 양떼를 빼앗아 올 것이며 몸소 목자가 되겠다고 약속하셨다. 『내가 사방에서 이 양떼를 다시 모을 것이며…싱싱한 목장에서 그들을 먹여 살릴 것이다…너희는 나의 양이며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다』.
마태오복음서의 길잃은 양과 착한 목자의 비유(18, 12~13)는 에제키엘서 34장16절을 배경으로 하며, 양과 염소를 갈라 심판하는 이야기는(마태25, 32~33)에제키엘서 34장20절을 배경으로 깔고 있다. 예수당시에는 대제관들과 지도층이었던 바리사이파인들이 못된 목자로 떠올랐다. 그들은 기원전 37년부터 외국 점령군의 비호를 받으며 백성을 다스렸고 백성들을 외딴 길로 끌고 가고 있었다(마카1서 1, 11~15 : 4, 21~50). 그들은 못된 목자들이어서 양들을 조금도 생각치 않는다. 아니 자기 양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리가 오면 양들을 내 버려 두고 도망친다. 그러면 양들은 물려 가고 뿔뿔이 흩어져 버리고 만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께서는 에제키엘서에서 예언한 대로 「나는 착한 목자이다」라고 외쳤다.
여기서「착한 목자」라는 말은 학자들에 따르면 「진실된」또는 「모범적인」목자라고 번역할 수 있다고 한다. 그 첫째 특징은 자기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일이다. 예수께서는 후에 제자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는 것을 일깨워 주시면서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 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 13)라고 하셨다. 이같은 사랑의 관계를 착한 목자와 양들의 관계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서로 「아는 것」, 이것이 착한 목자의 둘째 표징이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몰라 본다의 반대인 지적인 인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서로가 마음이 통하여 마음의 일치를 이루는 친교를 말하며 서로가 서로를 위하여 무엇이든 바치는 사랑의 희생을 하는 상화관계를 말한다.
이러한 뜻은 우리 생활에서는 어머니는 자기 아이들을 잘 알고 있지만 아이들은 어머니를 잘 모른다고 할 수 있다. 예수와 그 양들과의 관계는 서로가 잘 아는 관계이다. 하느님은 사랑의 보살핌으로 우리를 아시고 우리는 사랑의 충성으로 하느님을 안다. 예수께서는 이런 보살핌의 사랑을 표시하라고 하느님 아버지께로부터 우리를 당신의 양으로 주셨기 때문에(요한6, 37ㆍ44ㆍ65:17, 6~7)우리를 완전히 알고 계신다.
그런데 이미 선택된 우리의 양들만이 아니고 밖에서 헤매는 양들도 우리 안으로 불러들여야 한다. 밖의 양들도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봐야 하는 것이 완전한 우리 속에 들어가는 요건이 된다. 모든 양은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대목은 사도시대에 이교도에 대한 포교활동이 하느님의 뜻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명감을 가지는 전교정신을 반영한다.
예수의 가르침에 대하여 또다시 찬반 양론으로 갈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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