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족대이동과 교회의 포교
375년 훈족의 침입으로 시작된 이른바 민족대이동은 근 2세기동안 계속되었다. 새 민족들은 476년 서로마제국을 멸망시키고 각기 제국 내에 정착, 많은 국가들을 건설했다. 교회는 우선 이 야만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에게 문화를 전했다. 게르만족에 대한 복음화작업은 무려 8백여년이 소요되었다. 그것은 비잔틴과의 불편한 관계 아래서 새로 등장한 이슬람 아랍 세력에 대항하고, 이미 아리우스파로 개종한 게르만족의 박해를 받아가며 진행되어야 했다.
제일 먼저 아시아로부터 로마 제국에 침입해온 훈족은 이어 침입한 서고트족을 격퇴하면서 갈리아와 파리를 거쳐 마침내 452년 로마 앞에서까지 다달았다. 레오 대교황은 훈족왕 아틸라를 설득하여 그들을 물러가게 했다. 2년후 이번에는 반달왕 가이세릭이 아프리로부터 로마에 침입했다. 이번에도 레오 교황이 중재에 나섰으나 로마시가 약탈당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서로마제국이 게르만족의 침입을 이겨내지 못하고 손을 들었다. 이에 정복자들은 제국의 영토를 점령하고 거기에 새로 국가들을 세웠다. 서고트족은 스페인에, 반달족은 북아프리카에, 프랑크족은 북쪽 갈리아(프랑스)에, 부르군드족은 남부 갈리아에, 앵글로 색슨족은 브리타니아(영국)에, 동고트족과 랑고바르디족은 이태리에 정착했다.
그런데 아직 이교도였던 프랑크족을 제외하면 다른 게르만족들은 거의가 다 이미 4세기에 아리우스파로 개종한 서고트족의 영향을 받아 아리우스주의를 신봉하고 있었다. 아리우스파 교회는 로마교회내지는 교황과 분리된 교회로서 오직 왕에게만 충성을 요구했기 때문에 자연 아리우스파 군주들은 그들의 국가에서 가톨릭 주민을 박해하게 되었다.
아프리카에서는 글자 그대로 야만족이었던 반달족이 지배하는 동안(428~533)가혹한 박해를 받았다. 가이세릭왕에서 시작된 이박해는 1백여년간 지속되면서 수많은 희생자를 냈다. 이태리에서는 특히 테오도릭이 동고트왕으로 있을 때(493~526)박해를 받았다. 처음에 그는 가톨릭에 호의적이었으나 만년에 박해자가 되어 교황 요한 1세를 강금하고 또 유명한 로마 철학자 보에시우스를 감옥에서 교살시켰다. 스페인에서도 아리우스파 군주들이(466~586)주교들을 추방하고 감금하는 등 교회를 박해했다.
그러나 아리우스파 게르만족들도 마침내는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516년에 남부 갈리아의 부르군드족이 가톨릭으로 개종한데 이어 589년에는 스페인의 서고트족이, 689년에는 이태리의 랑고바르디족이 개종했다. 이로써 아리우스파는 소멸되었다. 한편 아프리카의 반달 왕국과 이태리의 동고트 왕국은 그간 멸망했다(전자는 533, 후자는 570).
■ 프랑크족과 앵글로 색슨족의 개종
4세기에 북부 갈리아에 진출한 프랑크족은 클로비스 왕을 맞으면서 그 왕국이 전 갈리아로 확대되었다. 이교인이었던 클로비스는 가톨릭인 그의 부인 클로틸다의 권고와 특히 알라만인과의 전투에서 그리스도교 신의 위력을 체험하게 되자 496년 성탄절에 3천명의 프랑크인과 함께 가톨릭으로 영세 입교했다.
클로비스의 개종은 교회사적으로는 물론 세계사적으로도 의미가 크다. 그는 이미 아리우스파로의 개종을 거절했었으므로 그의 개종으로 아리우스파 게르만족을 정복하는 일이 더욱 쉬워졌다.
또 프랑크족은 장차 서양을 지배할 세력이 되기 때문에 앞으로 탄생하게 될 그리스도교적 서구의 터전도 마련된 셈이었다.
로마령 브리타니아(영국의 중남부)는 이미 3세기에 복음이 전해졌었으나 5세기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소멸되었다. 이에 그레고리오 대교황은 그 지방에 새로 정착한 게르만 색슨족에게 복음을 전할 결심을 하고, 596년 로마의 아우구스티노 대수도원장을 40명의 베넥딕도회 수사들과 함께 브리타니아로 파견했다. 성과는 놀라웠다. 벌써 그 다음해 성탄 때 켄트왕을 위시해서 1만명이 세례를 받았다. 로마로부터 선교사가 계속 파견되었고 또 이웃 애란에서도 선교사들이 왔다. 곧 앵글로 색슨족이 완전히 그리스도교화되었고 영국교회는 7세기에 교회와 문화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남녀 수도원들이 신심과 학문의 중심이 되어 많은 성인과 학자를 배출했다. 교회학자인 베다 성인(672-753)은 「앵글로 민족의 교회사」를 저술하고 당시 융성했던 교회생활과 그리스도교 문화를 후세에 전했다.
이웃 애란(아일랜드)은 이미 5세기 중엽에 팩트릭(파트리치오)에 의해 그리스도교화 되어 있었다. 온 섬이 수도원으로 가득찼었다. 이 수도원들은 동시에 교회, 종교생활, 심지어는 교회행정의 중심 역할까지 했다. 6세기에 수도생활이 꽃을 피웠고, 거기서 수많은 성인과 학자가 배출되었다. 그래서 이 섬이 미구에 「성인 섬」으로 불리게 되었다.
애란 수도자들은 그리스도를 전하고자 고향을 떠나 어디서나 고향처럼 지내면서 유럽 대륙 곳곳에 복음을 전하고 수도원을 세웠다.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 콜롬바노였다. 그는 5백90년부터 대륙을 두루다니며 복음을 전파하고 또 많은 수도원을 세웠으며 수도회 규칙까지 만들어 주었다. 그는 만년에 상부 이태리로 가서 그 곳에 수도원을 세우고 6백15년에 사망했다. 이밖에도 킬리안, 프리돌린갈루스 등이 대륙에 전교했다. 쌍트 갈른(오늘의 스위스)은 갈루스가 처음으로 수도원을 세운 도시이다.
앵글로 색슨 수도자들도 대륙 포교에 따라 나섰다. 그러나 그들의 선교방법은 완전히 달랐다. 그들은 애란 선교사들과는 달리 매우 조직적이고 계획적이었다. 또 그들은 프랑크 왕국의 상부층을 상대로 했고 또 사전에 로마로 가서 반드시 로마의 협조와 지지를 구했다.
최초의 뛰어난 앵글로 색슨 선교사는 요크의 주교 빌프리트였다. 그는 6백79년이래 프리슬란트(화란)에 전교했다. 이어 에그베르트비그베르트, 빌리브로르드, 보니파시오 등이 뒤따랐다. 특히 보니파시오는 다음 8세기에 게르마니아에서 교회조직을 더욱 강화하고 프랑크 교회를 개혁하는 등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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