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예수의 기적과 말씀으로 일반민중은 그 분이 하느님이 보내신 메시아라는 심증을 굳히지만 적대자들은 집요하게, 그리고 노골적으로 예수를 배척하는 국면에 접어 들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이제 복음서는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루가를 중심으로 기술하게 된다.
루가 복음서는 예수의 여행에 관하여 많이 언급하며(9, 51~57 : 10, 1ㆍ38 : 18, 31ㆍ35 : 19, 51) 그 여행은 갈릴래아에서 사마리아를(이방인지역)거쳐 유대아지방으로 여러 번 여행했고 이 모든 여정은 전도여행이었으며 결국은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이라는 것을 돋보이게 한다. 그러나 루가가 기술하는 예수의 여행기는 지정학적으로 또는 연대순으로 정확하게 알리려는데 목적이 있지 않고 신학적인 뜻이 있다.
예수의 복음전파는 여행으로 이루어지며 그 목적은 예루살렘에서 달성된다. 루가의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여행기며 그 여행은 복음이 유대아에서 여러 이방인 지방을 거쳐 로마(새 예루살렘)로 향하고 있는것과 대조된다. 이러한 뜻에서 오늘의 대목의 시작이「예수의 일행이 길을 가고 있는데…」로 시작한 것은 「전교여행도중에」라고 읽을 수 있다. 그 곳이 어느 곳인지 루가는 관심이 없다. 루가와 병행구를 이루는 마태오 복음서는 이 장면을 가파르나움에서 데카폴리스로 건너가기전으로 짐작케 한다. 하여튼 여기서 세 사람의 제자 지원자들이 등장한다. 이것은 예수께 대한 배척의 주제로부터 예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을 예수의 대상자로 변경시키는 광경이다.
어떤 사람이 예수께 제자가 되어 따라 다니겠다고 청원한다. 병행구를 이루는 마태오복음서는 이 어떤 사람을 율법학자라고 밝히고 있다. 그는 예수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자기와 예수와의 관계를 사제지간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인생을 배우는 사제지간의 관계가 아니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자기를 버리고 완전히 예수를 따라야 한다.
우선 사람들의 배척을 당하는 예수, 이 세상이 자리잡을 곳이 없는 예수를 직시하여 그 운명을 같이 할 각오가 서 있어야 한다. 그러한 뜻으로 예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人子) 이라는 말은 신약성서에 86번이나 나오고 루가 복음서에는 25번이나 나오는 예수의 호칭으로 예수 자신이 당신을 가리키는 유일한 호칭으로 사용한 말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사람의 아들이라 호칭하면서 지상에서 일하는 일꾼이며,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부활할 분이며 세상 마칠때에 심판하러 오실 분이라는 뜻을(다니 7, 13~14)암시하고 있었다. 이러한 뜻을 지닌 사람의 아들인 예수를 따르겠다고 자원한 사람이 예수의 말씀을 듣고 어떤 응답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후세기를 통하여 예수의 제자가 되려는 모든 사람들이 각자 새로이 결정해야 할 문제로 남아 있을 뿐이다.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는 초청을 하신다. 그 초청은 구원의 길을 같이 가자는 초청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 장례를 지내야겠다고 사정을 말한다. 유대아인들에게 죽은 이를 장사지내는 일은 그 무슨 일보다도 먼저 해야 할 중대종교의무였다. 시체와의 접촉으로 종교적 부정을 탄다는 이유로 시체접촉이 금지되어 있는 사제들도 친척이 죽으면 시체를 만질수가 있을 정도였다(레위21, 1~3).
연고자가 없이 죽은 시체를 장사지내 주는 일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 사람의 실천이었고 자기 아버지의 장례를 지내는 일은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종교적 의무였다. 유대아인들에게 그 의무를 소홀히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조차 없는 일이었다.
이처럼 중요한 일을 예수를 따르는 일과 견주어 뒤로 돌려야 할 만큼 예수를 따르는 일이 중요한가. 예수의 대답은 「그렇다」이다. 세상의 일과 하느님의 일의 비교이기 때문이다.
세상사의 중대사로 죽음을 예로 들은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죽은 자의 장례는 죽은 자에게 맡겨두라』는 말씀은 아버지 장례지내는 것을 막은 것이 아니고 죽음의 일에 얽매이다가 생명의 일을 잃어서는 안된다는 신학적인 뜻이 있다. 죽은 자가 죽은 자를 장례지낼 수는 없다. 여기서 장례일에 매달리는 죽은 자는 영적으로 죽은 자를 가르키고 시체를 남긴 죽은자는 육체의 죽음을 뜻한다. 생명의 길 즉 예수를 마다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죽은 자이다. 그러니 예수의 말씀은 세속일은 세속사람에게 맡기고 하느님나라 소식을 전하면서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이 다급한 일이다.
예수를 따르는 제자의 정신자세가 두 가지가 확립되었다. 즉 고난의 길이라도 같이 따라가는 자세와 세속일에 마음쓰지 않는 일이다.
이제 제3의 자세가 요구된다. 그것은 인사(人事)에 애착을 주지 않는 일이다. 쟁기를 잡고 밭가는 사람이 뒤를 돌아다 볼 필요는 없다.
구약시대에 엘리사는 엘리아의 부름을 받고 스승을 따라가기전에 먼저 부모님께 작별인사를 하겠다고 청하여 허가를 얻었다(열왕상19, 19~21). 그러나 예수의 요구는 더 엄격하다. 하느님 나라를 개척하러 가는 사람은 인정에 얽매이거나 과거사에 미련을 남겨서는 않된다. 오로지 달려야 할 길만을 꾸준히 달리고 우리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만을 바라보아야 하다(히브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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