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잔틴 제국과 이슬람
민족의 대이동으로 비록 서로마제국은 완전히 멸망했을지라도 동로마제국은 계속 그들의 위협을 받아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견고한 국가로 남아 있을 수 있었다. 철저한 가톨릭 신앙에서 비잔틴 교회와 비잔틴 문화의 전성을 초래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527-565)는 반달족과 동고트족을 정복하고 이태리에 비잔틴 정권까지 재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곧 이번에는 랑고바르디족이 침입해 왔고 또한 페르시아, 슬라브, 불가리아, 무엇보다도 새로 등장한 이슬람 아랍인들로부터 새로운 위협을 받게 되었다.
황제 헤라클리우스(610-641)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고 예루살렘을 점령하는 동시에 약탈 당했던 주님의 십자가도 되찾아 올 수 있었다. (628). 그러나 걷잡을 수 없이 침입해 오는 이슬람의 공격을 막기는 어려웠다. 아랍인들은 637년 예루살렘을 점령한데 이어 팔레스티나, 이집트, 북아프리카를 잇따라 점령했다. 이슬람 세력에 의해 지중해 세계가 가로 막혔다. 그래서 동서간의 소통이 어려워지고 상호의 화해가 더욱 어려워 지게 되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슬람교(회교)를 창시한 사람은 마호메트이고 그가 메카에서 추방된 622년이 이슬람교 기원의 원년이다. 유일신 알라, 그리고 그의 예언자 마호메트, 이것이 그 신조의 골자이다. 또한 「코오란」에는 소위 마호메트가 받았다는 계시가 집대성되어 있다. 알라신을 위한 싸움에서 죽는 사람에게 천국을 약속하며 비이슬람에 대해 증오심을 일으켜 그들에 대한 싸움을 성전(聖戰)으로 선동한다. 그래서 마호메트의 후계자들에게서 침략과 약탈 전쟁이 전개되고, 미구에 지중해 연변을 거의 영토로 차지하게되었다.
동서간의 대립은 지중해에서의 아랍세력의 차단만이 아니고 동로마 황제들의 종교분쟁을 통해 더욱 조장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단성론자들을 교회에 복귀시키려는 의도에서 반단성론자들이 저술한 3편의 저술을 단죄했다. 이에 로마교회에서 항의했다. 그러나 황제는 553년 5차 공의회(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그 세 저서를 단죄케 했고, 동시에 그것을 반대한 비질리오 교황을 파문케 했다. 교황도 곧 강제에 못이겨 공의회 결의에 동의했다. 이것이 이른바 삼장논쟁(三章論爭)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세르지우스가 역시 단성론자들과 화해하려는 의도에서 단의론(單意論=그리스도에게 신적(神的) 의지만이 남아있다는 이단)을 주장했다.
호노리오 교황은 세르지우스의 주장을 시인했다. 그러나 마르티노 교황은 단의론을 이단으로 단죄했다. 그래서 그는 유배되어 거기서 사망했다. 마침내 이 이단은 681년 6차 공의회(3차 콘스탄티노플)에서 단죄되었다. 그런데 이때 호노리오 교황도 함께 단죄되었다. 그래서 이것이 그후 교황의 무류성의 여부를 놓고 논란이 일게 되었다(호노리오 문제). 그러나 그것은 무효성과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첫째 그것은 호노리오 교황이 장엄하게 성좌(聖座)에서 선언한 것이 아니고 개인적인 견해에 불과했고, 둘째 공의회는 그가 단의론을 가르쳤다고 해서가 아니라 다만 그것을 충분히 막지 못한 태만 때문에 그에게 유죄선고를 내렸었다.
■ 그레고리오 대교황(590-604)
동로마 황제들은 이태리와 로마가 북쪽 랑고바르디족으로부터 계속 위협을 받고 있는데도 도와주지 못하고 있었을뿐더러 로마교회와의 분열을 조장시키고 있었으므로 교황직이 아주 어려운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럴때 교황위에 오른 사람이 바로 그레고리오였다.
교황은 이런 상황에서 우선 로마의 정치적 군사적 책임을 지고 나섰다. 그는 랑고바르디인들이 로마를 포위하자(592/3) 평화적인 단판으로 그들을 퇴각시켰다. 또 그는 그간 황제들과 신자들이 기증한 이른바 「성베드로의 세습재산」으로 불리는 방대한 토지의 교회재산을 「빈민의 재산」이라고 하며 빈민구제와 사회복지를 위해 사용했다. 이로써 교황의 세속 권력이 점점 커졌다.
그레고리오는 게르만족에게 의식적으로 관심을 보인 첫 교황이었다. 그래서 그는 영국에 선교사를 파견하는 등 게르만족의 개종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들에게서 미래를 위한 새로운 의미를 인식함으로써 장차 그리스도교적 중세 서양을 탄생시키는 개척자가 되었다. 또 그는 포교에 있어서도 서둘지 말고 그 지방의 전통과 관습에 적용하도록 지시하는 현명성도 보였다.
교회개혁을 위한 그의 역할은 더욱 컸다. 그는 최고의 목자로서 성직자 생활의 쇄신의 일환으로 성직자들에게 「사목규칙서」를 만들어주었다. 이것은 중세기 사제양성의 기초가 되었다. 그밖에도 많은 저서와 8백여통의 서한을 남겼다. 그래서 그는 교부인 동시에 암브로시오, 아우구스티노와 더불어 서방의 4대학자 중 한사람이다.
그레고리오는 최초의 수도자 교황이다. 그는 부유한 로마 원로원가족에서 태어나 상속 받은 부모의 로마 저택을 수도원으로 제공하고 자신도 거기서 수도생활을 했다. 그는 사재를 털어 또 6개의 수도원을 세웠다.
또 그는 로마 미사 전문(典文)을 완성하는 등 전례개혁에도 힘썼다. 교회 전통은 그를 그레고리오 성가의 개시자로 본다. 그러나 과연 그것을 그레고리오가 시작했는지는 확실하지가 않다.
그의 건강은 원래 아주 허약했다. 그러나 그는 강인한 정신력으로 놀라운 활동력을 보였다. 그는 안으로는 수도자이고 밖으로는 통치력이 뛰어난 정치가였다.
그는 무엇보다 겸손한 교황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전세계 총대주교로 자칭한것과는 대조적으로 그는 자신을 「하느님의 종중의 종」이라고 부르며, 지배 보다는 봉사를 솔선수범했다. 교황의 이 별칭은 그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역대교황들에 의해 애용되고 있다.
후세는 그레고리오에게 「대교황」이란 별명을 붙였다. 실제로 그의 14년간의 재위는 세계사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는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가는 역사적 전환기의 교황으로서 새로운 미래를 개척한 위대한 역사적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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