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제자들을 전교에 파견하는 이야기는 복음서에서 두번 나온다. 한 번은 12제자들을 파견하는 이야기이고 두번째는 오늘의 대목으로 72제자들을 파견하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두 번째 파견 이야기는 오직 루가만이 전해주고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그들에게 내리시고 주의사항이 두 경우 다 거의 같다.
이것을 문제삼아 성서학자들은 두번째 파견이야기는 루가가 재조정하여 기록한 것으로 역사성이 의심스럽지 않느냐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였지만 복음서에서 연대나 날짜순으로 사건을 처리하는 것은 복음서의 정신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복음서는 역사서가 아니고 복음을 전하는데 필요한 교훈을 중시해야 한다. 여기서는 첫번째 파견과 두번째 파견에 있어서 사도 12명의 파견과 제자 72인의 파견의 차이에 그 뜻이 더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사명은 12사도뿐 아니라 또 일단의 전교단이 특별 임명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단원은 초대교회가 세계를 향하여 전교하고 있는 양상을 나타낸다.
파송된 제자들의 숫자는 필사본에 따라 70인 혹은 72인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두 숫자는 다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선 70이라는 숫자는 대홍수 이후 노아의 후손이 세상에 퍼져 새 민족을 이룰 때 70인종으로 나열되어 있고(창세 10장), 야훼가 모세를 산으로 부를 때 이스라엘의 장로 70명을 대동하라고 명령했으며(출애 24, 1 : 민수11, 16~17ㆍ24~25), 산헤드린 최고회의는 7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70인역 그리스 성서에는 창세기 10장의 새 인종을 72민족으로 서술하였고 70인역을 준비한 장로들은 모두 72인이었다. 세계안에 72명의 왕자들과 72개의 언어가 있다고 여겨졌었다(에녹3서 17, 8 : 18, 2~3 : 30, 2).
이상의 숫자 맞추기 해석들은 역시 해석에 불과하며 루가복음서의 근본정신은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해지기 위하여 예수께서 많은 선교사들을 파견했다는 것이며 후대 교회가 세계 속에 복음전파를 전개하는 활동양상을 서술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72명의 제자를 뽑아 둘씩 짝지어 보내셨다고 했는데 수학적으로는 36쌍의 파견대를 보내셨다는 말이 되고 이들이 72민족을 전전할려면 한쌍이 두 민족씩 다녀야 했을지도 모를 일이겠으나 복음서에서는 숫자계산을 산수계산으로 하지 않는다.
72제자들을 뽑았다는 것은 만민에게 보낼 일꾼들을 뽑았다는 뜻으로 그치고 둘씩 짝지어 보냈다는 것은 12제자들을 파견하실 때에도 그랬는데(마르 6,7) 이방인속에서의 활동의 둘씩의 협력이 더 효과적이며 구약시대의 정신을 따라 서로 증인이 될 수 있는 법적 효과도 있기 때문이다. 이 관습은 후대 교회의 선교생활의 전통이 되었다. 이들을 「앞으로 찾아 가실 여러 마을과 고장으로」미리 보내셨다고 했는데 이 말씀은 72제자들이 선교한 곳을 예수께서 나중에 일일이 찾아 다니셨다는 것이 아니고 여러 마을과 고장, 즉 온 세계에 퍼져 나가는 복음따라 예수께서 현존하신다는 영적인 뜻이 있다.
파견의 훈시말씀은 제1차 파견때와 거의 같다. 이 말씀은 아마 제3, 제4의 파견이 있었더라도 똑 같을 것이고 지금 교회의 선교파견식에도 같은 말씀으로 파견된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으니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을 보내 달라고 청하여라』. 추수라는 이미지는 구약성서에서 세상종말에 가서 하느님의 백성을 모아들이는 종말론적 뜻이 있었다(이사27, 12 : 요엘 3,13). 이 종말론적 영상이 예수의 복음을 세계에 전파해야 할 사도들에게는 이제 막 시작하려는 하느님나라 전파로 이미지가 바뀌었다. 세계선교의 막중함을 복음서 저자는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구약에서는 추수일꾼을 천사들이었고 그 숫자는 헤아릴 수 없게 많다. 여기서는 그 임무가 제자들에게 주어지고 그 임무를 수행할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느님(추수주인)께 일꾼들을 많이 보내 달라고 기도하라고 재촉하신다. 하느님나라일은 역시 하느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추수마당으로 가는 일은 예사일은 아니다. 그것은 어린 양이 늑대소굴에 뛰어들어 무슨 일을 하겠다는 무모한 일에 비교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어린 양들을 이리떼속에 보내는 것은 일이 그 만큼 막중하기 때문이며 누군가는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위험성을 파견하는 주님이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은 파견되는 제자들에게 굳은 신뢰심을 갖게 한다. 파견하는 말씀은 단호하다. 『가라,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마치 어린 양을 이리떼가운데 보내는 것 같구나』「보낸다」는 말씀은 선교하는 교회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뜻을 가진다. 그것은 사도들이 여러 지방을 전교하는 것은 주님의 위임을 받고 사도직을 이행한다는 복음선교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마태오는 같은 대목에서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 같다 』고 하시고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양순하라』는 말씀을 덧붙였다. 제자들이 사명을 받고 떠남은 불확실성이라는 막연한 곳으로 간다는 것뿐 아니라 무방비 상태로 모험에 뛰어드는 것과 같다. 따라서 고난이 예수의 제자된 사도직을 수행하는데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된다.
그렇다고 순교에로 무작정 뛰어 들지는 말고 「뱀처럼 슬기로와라」라고 훈시하신다. 뱀은 가장 간교한 동물이라고 창세기에 언급되었지만(창세 3,1)땅을 기며 자기 갈곳을 알고 위험을 피한다. 슬기는 사려깊고 사태파악을 정확히 하는 것을 말한다. 제자들은 위험속에서도 피할수 있는 가능성과(마태10, 23)변호할수 있는 권한을 늘 가지고 있다(마태10, 17). 뭐니뭐니해도 제자들의 본성은 양순함에 있다. 양순함이란 간교를 부르지 않는데 있다. 슬기와 양순은 고난속에서 일하는 제자들의 기본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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