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기(6ㆍ7세기)에 교회는 대회적으로 새로운 민족, 즉 게르만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교화하는 일에 여념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내적인 일이 등한시되지 않았고 여러가지 전례의 형성, 축일의 증가, 종교 예술의 발전 등 전례와 성사 분야에서 주목할만한 변화나 개혁이 없지 않았다. 특히 베네딕도 성인의 출현으로 서구에서도 수도생활이 꽃피게 되었다.
■ 전례와 성사생활의 변화
4세기부터 여러가지 전례 양식이 형성되면서 미사와 성사를 각기 다른 의식과 양식으로 집전하는 관습이 생겼다. 그중 중요한 것이 비잔틴 전례는 동방에 많이 보급되었고, 로마 전례는 서방에 많이 보급되었다. 물론 서방에 암브로시오와 갈리아 전례 등 다른 전례도 있었다. 그러나 미구에 로마전례만이 서방의 거의 유일한 전례로 남게 되었다.
6세기부터 유아세례가 보편화되면서 점차 세례 지원기가 사라지게 되었고 그 결과 지원기 동안 실시되던 여러가지 의식도 통합되기에 이르렀다.
미사는 6세기부터 매일 미사가 일반화됨에 따라 회중 미사가 아닌 개인 미사도 등장했다. 또한 예비신자가 드물어짐에 따라 예비자와 신자 미사의 구별도 없어졌다.
「미사」란 말이 6세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는 「빵의 나눔」또는 「에우카리스티아」란 말로 불렸다. 「미사」란 말이 없지 않았으나 그것은 성체봉헌 의식이 끝났으니 돌아가라는 말을 의미했었다(Ite Missa est).
영성체는 박해때는 자주 했으나 4세기부터 드물어지기 시작, 많은 신자들이 1년에 3, 4회 즉 대축일에나 영성체할 정도였다.
고해성사, 즉 공적 고백, 속죄, 화해 등 매우 엄격격했던 속죄 절차가 마침내 폐지되고 그 대신 애란과 영국 수도자들의 영향을 받아 자주 고해를 하는 이른바 비밀고해(사고해)가 도입되어 평신도들에게까지 보편화되었다.
축일이 크게 증가되었는데 주님의 축일로는 예수성탄, 예수승천이 첨가되었고, 성모축일은 에페소 공의회 이래 성모 신심이 널리 보급되면서 동방으로부터 성모취결례와 성모영보, 성모의 성탄과 승천 등 네 축일이 도입되었다. 또 순교자 외에 사도들이나 수도자들도 성인 축일로 지내게 되었다. 순교자들의 유해가 카타콤바에서 로마시내 성당으로 옮겨지면서 유해 공경과 함께 카타콤바의 순례가 시작되었고, 십자가 공경과 팔레스티나 성지 순례는 이미 4세기 십자가의 발견과 함께 시작되었었다.
단식은 4세기에 사순절 단식이 시작되었고, 5세기에는 사계(四季)단식도 생겼다.
전례도 화려해졌다. 그것은 고유한 성당이 생기고 그 건축과 장식이 화려해졌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바실리카 양식의 성당 건축이 크게 발전했다. 바실리카는 본디 로마시대의 재판소 건물이었는데 평화가 오자 교회에서 그것을 모델로 성당을 짓게 되었다. 바실리카에는 장방형(라틴 십자가)과 정방형(희랍 십자가)이렇게 두 양식이 있었다. 그런데 동방에서 정방형 바실리카가 이 세기에 그 전성을 이루었다. 이것은 성당 중앙에 웅장한 둥근 지붕이 가장 특징이고, 그 전형적인 것이 유명한 콘스탄티노를(오늘의 이스탄불)의 성소피아 성당이다. 이것은 537년에 축성되었는데, 그때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살로몬, 내가 너를 이겼다』고 하며 자랑해 마지 않았다. 외양은 아름답지 않으나 내부는 모자이크 등으로 화려하다.
■ 서구 수도생활의 개화(開花)
이미 본 바와 같이 수도생활은 3세기 동방 이집트 사막에서 시작되어 바실리오의 수도회 규칙과 더불어 급속히 동방 전역에 보급되었다. 이어 서방에도 전파되어 특히 갈리아의 마르티노 성인에 의해 크게 발전하면서 수도자들이 복음을 전파하는 일까지 담당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실리오의 규칙은 서방인에게는 너무 엄격해서 그렇게 발전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서방에도 성 골롬바노에 의해 고유한 수도회 규칙이 나오게 되었다. 애란 출신인 골롬바노는 대륙으로 건너와 복음을 전하는 한편 많은 수도원을 세우는 동시에 필요한 규칙서도 만들어 주었었다. 이것 역시 엄격했으나 그런대로 상당히 널리 보급되었다. 이러한 상황일 때 베네딕도 성인의 유명한 규칙이 나왔고 그래서 미구에 서방에서 수도회의 거의 유일한 규칙서로 군림하게 되었다.
베네딕도는 480년경 이태리의 움브리아지방 누르시아의 한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다. 로마에서 수학하던 중 그 곳의 방탕한 생활을 보고 세상에 염증을 느껴 로마 근방의 한 동굴로 은둔했다. 제자들이 모여들자 그는 수비아코에 10여개의 수도원을 세우고 그들과 같이 공주생활을 시작했다. 이어 그는 529년 남쪽 몬테 카시노로 자리를 옮기고 그 곳에 큰 수도원을 세웠다. 이래 몬테 카시노 수도원은 서구 수도생활의 중심지요 베네딕도 수도회의 요람인 동시에 본산이 되었다. 한편 그의 누이 스콜라스티카 성녀도 그 근처에 여자들을 위한 수도원을 세웠다.
베네딕도 성인은 몬테 카시노에서 많은 사람들을 지도할 수 있는 규칙서의 필요성을 느끼고 그것을 저술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때까지의 규칙서들처럼 지나치게 엄격하거나 부담을 주지 않았을 뿐더러 인간미가 있고 유연하고 명료했다. 그것은 성무일도ㆍ묵상ㆍ기도ㆍ독서ㆍ노동ㆍ식사ㆍ수면ㆍ휴식 등이 적절한 시간으로 배합되어 있다. 요컨대 그것은 하루의 일과가 「기도하고 일하라」는 표어로 요약되는 것이었다.
베네딕도 수도회는 특히 그레고리오 대교황 때부터 서구 전역에 급속히 전파되었다. 그레고리오 교황은 로마에 최초의 베네딕도 수도원을 세우고(589) 자신도 수도자가 되었다. 또 그는 베네딕도 수도자들을 선교사로 영국에 파견했다. 또 독일의 사도 보니파시오는 베네딕도회 규칙을 서구 수도 생활의 유일한 규칙서로 통용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후 베네딕도 회원들은 교회와 고대의 고전들을 수집하여 전하고 또한 자선사업과 포교활동을 통해 교회와 사회에 놀라운 봉사를 했다. 교황만도 40명을 배출했다. 이런 이유에서 성 베네딕도가 서구 수도생활의 성조(聖祖)로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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