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기도에는 상반된 구조적 방향이 전개되고 있다. 아버지, 그분의 거룩함, 그분의 나라, 그분의 뜻이 위(하늘)를 향하고, 다른 쪽은 빵, 용서, 유혹, 악은 땅을 향해 있다.
신앙의 눈은 둘이다. 먼저 하느님을 우러르고 그분의 빛을 응시하며, 또 하나는 땅을 향해 어둠의 비극을 분별한다. 내적 인간은 하느님을 향하는 동시에 땅 위에 있는 외적 인간의 무게를 경험한다.
모든 현실은 하느님 앞에 놓여 있다. 하늘을 향한 무한한 갈망과 일용할 양식 모두가 하느님께 올려진다. 신앙인 또한 주님의 기도 안에서 제자들에게 전달된 비의(秘義)를 만난다. 세상의 모든 비극에 대한 인식을 전제로 하는 이 기도는 결코 가볍지 않다.
기도하는 제자에게는 하느님의 침묵, 그분의 멀리 계심, 그리고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고난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는 신앙고백이 전제된다.
아버지께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시고 당신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새롭게 하실 것을 기대하는 확고한 희망이다. 이럴 때라야 하느님의 ‘평화’(shalom)가 그 안에 동터온다. 이는 거대한 사랑의 행위다. 단순히 아버지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 아버지’라고 말하기에 예수님의 영이 우리를 대신하여 기도하신다.
“진정 여러분이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고 계십니다.”(갈라 4,6; 로마 8,15 참조)
성령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우리 아버지!’ 하고 기도하게 하신다. 이는 예수님과 더불어 나누는 종말론적 친교의 의미로 다가온다.
이제 하느님의 관심은 인간의 관심사와 유리되지 않고, 인간의 관심사가 낯설지도 않다. 하늘을 향한 간구의 힘은 되돌아와 땅 위의 관심사에 영향력을 발휘한다(이사 55,11 참조). 심오한 통일성에 싸여 있는 하나의 운동과도 같다. 이러한 상호 개입은 실로 놀라운 투명성이다.
하늘의 고난이 땅의 고난과 연결된다. 그럼에도 하느님은 세상적인 욕구를 위해 결코 배신당하실 수 없으며, 현실에서 그분의 엄위하심이 인간 실존에 한계성을 부여한다는 것 역시 정당화될 수 없다. 그래서 기도, 탄원 그리고 찬양은 총체적인 해방의 기도가 된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기도이며, 주님의 기도에 담긴 영성의 핵심이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
하느님과 관계가 고난의 한복판에서 맺어지고 있는 것이다.
온갖 악의 경향들은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 나라에 대한 갈망을 증폭시킨다. 그래서 이 기도에 담겨 있는 현실은 아름다운 정경이 아니라 처절한 투쟁의 현실임을 자각하게 한다. 세상의 혼돈과 피조물의 신음까지도 껴안은 주님의 기도는 기쁨에 찬 신뢰와 정일(靜逸)한 참여의 분위기를 간직한다. 모든 것이 아버지와의 만남에서 하나로 통전되기 때문이다. 진정한 해방은 우리를 행동에 참여케 하시는 하느님과의 만남이다. 모든 활동의 ‘원동자’(the prime mover)이신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밝히 드러내지 못하는 그 어떤 해방의 과정도 목적을 달성하거나 완전함에 이를 수 없다. 실로 예수님 메시지의 정수인 주님의 기도가 교리적 진술의 형식으로가 아니라 심오한 기도의 형식으로 표현되었음에 감탄한다.
주님의 기도는 참된 믿음의 목적과 실존(삶)의 가치가 축약된 교회의 기도, 하느님 백성의 기도다. 이렇듯 21세기 오늘의 제자도 주님의 기도를 관상하고 행동으로 옮기며 살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