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9년 기해박해 때 김제준 성인이 포졸들에게 체포되는 장면(탁희성 작).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김제준(이냐시오) 성인은 대대로 물려온 신앙을 첫 한국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에게 물려준 장본인이자, 신앙을 증거하다 순교한 성인이다.
성인은 1796년 신심 깊은 집안에서 태어났다. 여러 차례 박해가 지속되면서 성인의 집안에서도 여러 명의 순교자가 났지만, 성인의 집안은 신앙을 굳게 지키고 이어오고 있었다. 성인의 조부는 1814년에 순교한 복자 김진후(비오)다. 또 성인의 작은 아버지인 복자 김종한(안드레아)도 신앙을 증거하다 순교했다.
성인은 어려서는 충청도 솔뫼에서 살았으나, 이후 내포 놀매로 이사해 생활했다. 그는 아내 고 우르술라와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김대건 신부다.
성인은 신심이 두터운 신자였다. 박해가 심해지자 성인은 가족들과 함께 살던 곳을 버리고 용인 한덕골과 은이로 피신해 생활하면서 신앙을 지켜나갔다. 이후 성인은 모방 신부로부터 세례와 견진성사를 받고 회장직을 수행했다.
또 성인은 아들 김대건에게 신앙을 물려주고 신학생으로 선발될 수 있도록 이끌었다. 박해가 극심하던 그 시절에는 아들을 신학생으로 외국에 보낸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성인은 이런 고난을 모두 알면서도 기꺼이 아들을 마카오의 신학교로 보냈다.
1839년 기해박해의 칼날은 성인에게도 닥쳐왔다. 배교자 김순성(김여상)이 포졸을 이끌고 성인의 집으로 몰려온 것이다. 기운이 장사였던 성인은 집안에 들이닥친 포졸들을 제압할 수 있었지만, 조금도 저항하지 않고 체포됐다.
체포 후 아들 김대건이 유학을 간 사실이 드러나자 성인은 국사범으로 취급돼 통상적인 형벌보다 더욱 가혹한 형벌을 받았다. 성인은 처음에는 이를 견디지 못하고 배교하겠다는 말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함께 갇힌 신자들의 독려로 용기를 되찾고, 다시 마음을 돌렸다.
성인은 형조에 출두해 배교한 것을 취소하고, 이후로는 흔들림 없이 신앙을 고백했다. 성인은 “서양인을 데려온 것과 자식을 외국에 보낸 것은 모두 천주를 공경해 받들려는 까닭”이라고 당당하게 밝혔다.
이런 회심으로 인해 성인은 세 차례에 걸친 혹형을 받았지만, 끝까지 신앙을 고백했다. 마침내 1839년 9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사제로 장성한 아들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참수됐다. 이때 그의 나이는 44세였다.
■ 성인 발자취 만날 수 있는 곳 - 은이성지
은이성지(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은이로 182)는 성인이 공소회장으로서 활동하고, 아들을 신학생으로 보낸 곳이다.
성인이 은이공소에서 생활하기 전에 머물던 한덕골(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묵리 619-1)은 박해를 피해 성인이 가족과 함께 숨어든 곳이다. 현재 용인대리구 천리요셉본당에서 한덕골을 관리하고 있다.
※문의 031-338-1702 은이성지
은이성지 내 김대건 성인 세례터에 세워진 조형물. 왼편으로 진자샹성당을 복원한 새 성당이 보인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