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 예수님.
지난 한 주간 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몸 차원의 원리를 따라 지내셨나요, 아니면 정신 차원의 원리를 더 많이 따르셨습니까? 아니면, 우리 모두가 바라는 대로 영의 차원의 원리를 따라 지내셨습니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일상의 사소한 순간들 안에서는 각각의 원리를 따라야 할 순간들이 제각각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의 가장 근본적인 선택이 어느 차원에 놓여있는가의 문제라는 것, 그리고 우리 신앙인은 영의 차원의 원리를 삶의 원리로 삼고 살아가는 이들이라는 것도 말씀드렸죠.
그런데, 이렇게 영 차원의 원리 곧 ‘영성’을 삶의 근본 원리로 삼고 살아가다 보면 참 신기한 현상을 경험하게 됩니다. 어떤 현상일지 궁금하시죠? 그건 바로, 영성이 우리 삶의 중심이 되면 몸 차원이나 정신 차원의 행동들도 이러한 영의 원리를 따라간다는 겁니다. 음식을 먹거나 휴식을 취하는 것은 몸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행동이지만, 이런 행동들이 단순히 몸 차원의 원리만을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의 차원의 원리를 따라서 움직이게 된다는 것!
예를 들어, 누군가를 만나 식사를 하러 가게 되었는데 제가 먹고 싶은 것은 구수한 사골 만둣국이라고 해보죠. 그런데, 함께 있는 사람은 피자나 스파게티 같은 이탈리아 음식을 더 좋아합니다. 그럼 이때 몸의 차원 또 마음 차원에서는 제가 먹고 싶은 것을 먹으러 가자고 요구할 겁니다. 하지만, 영의 차원에서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을 위해서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먹으러 가자고 제 마음을 이끈다는 거죠. 그래서 저는 제가 먹고 싶은 만둣국이 아니라 상대방이 좋아하는 이탈리아 음식을 먹으러 기꺼이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정신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다 다른 사람들에게 주목받고 존중받고 대접받기를 원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고, 그래서 우리 행동의 많은 부분들은 이런 마음을 따라 움직이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랑, 기쁨, 인내, 호의, 온유, 절제 등의 영 차원의 원리를 근본으로 삼고 따르게 된다면, 우리 마음도 내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을 더 존중하고 드러나게 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것이고 그럼 우리의 행동도 겸손하고 온유한, 절제하는 모습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몸의 차원에서든 정신의 차원에서든 각각의 고유한 움직임들은 있지만 이러한 움직임들이 오로지 ‘나’ 자신만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향하고 ‘하느님’을 향하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다른 차원의 행동들이 영성이라는 보다 깊은 차원의 근본 원리를 따라서 움직여가는 모습들입니다.
하지만, 이런 일은 영성이 우리 삶의 근본 원리가 될 때만 일어나는 일입니다. 몸 차원이나 정신 차원의 원리가 삶의 근본 원리가 되더라도 영의 차원의 움직임이 다른 두 원리를 따라 이루어지지는 않지요. 그렇기 때문에도 우리 인간 삶의 근본 원리는 어쩔 수 없이 영의 차원이 될 수밖에 없지 않나 싶습니다.
이처럼 영의 차원, 곧 영성이 우리 삶의 근본 원리가 된다는 것은 우리 삶의 크고 작은 모든 부분들이 영 차원의 원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영성은 이처럼 다른 차원들의 중심이 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다른 차원들의 행동을 가늠하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얼마 전에 개봉한 ‘사일런스’(Silence)란 영화를 보셨나요? 사실 저도 아직 보지는 못했지만, 이 영화의 원작인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라는 소설은 신학생 시절에 읽은 적이 있습니다. 작가가 던져주는 물음이 오랫동안 제 안에 남아있었던, 굉장히 강렬한 인상을 남겨준 책이었죠. 17세기에 일본에서 선교하던 포르투갈 신부들 이야기를 다룬 내용인데, 이 가운데 백미는 죽어가는 신자들을 살리기 위해 예수님의 성화를 밟고 지나가는 배교 행위를 할 것이냐, 아니면 신자들이 죽더라도 끝까지 배교를 거부할 것이냐 하는 선교사의 내적 갈등 부분입니다. 우리 독자분들께서 그런 상황에 놓이신다면,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결국 소설 속 선교사 신부는 성화를 밟고 지나감으로써 신자들을 살리는 것을 선택합니다. 그 장면을 작가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죠.
“신부는 발을 올렸다. 발에 둔중한 아픔을 느꼈다. 그것은 형식이 아니었다. 자기는 지금 자기 생애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다고 여겨온 것, 가장 성스럽다고 여겨온 것, 인간의 가장 높은 이상과 꿈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밟는 것이었다. 이 발의 아픔. 이때 밟아도 좋다고 목판 속의 그분은 신부를 향해 말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나, 너희들의 아픔을 나누어 갖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졌다. 이렇게 해서 신부가 성화에다 발을 올려놓았을 때, 아침이 왔다. 닭이 먼 곳에서 울었다.”(엔도 슈사쿠, 「침묵」, 바오로딸, 2012, 296~297쪽)
어떻게 하는 것이 더 나은 답일까요? 이 신부의 행위는 분명 예수님의 성화를 밟고 지나가는 배교의 행위였습니다. 몸의 차원에서 본다면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고 싶어 하는 원리를 따른 행동일 수 있겠지요. 정신의 차원에서 본다면 자신이 믿고 고백하는 신앙을 배반하는, 정신 차원의 원리에 위배되는 행동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의 차원에서 본다면, 우리를 구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마음을 가장 잘 알아듣고 따르는 행동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배교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행위가 어떤 원리를 따라서 나온 것인지를 우리는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먹고 마시고 움직이는 우리 삶의 모든 행동들, 겉으로는 같아 보일 수 있지만 실상 그 안에 담겨 있는 근본 원리가 무엇인지에 따라서 그 행동의 참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결국, 영성이 우리 삶의 근본 원리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영의 차원의 원리만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영의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몸의 차원, 정신의 차원에서도 우리가 선택하고 행하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영의 차원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지는 행동들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일 날만 또는 성당에서만 ‘영성’을 사는 것이 아니라, 몸의 차원과 정신의 차원을 포함한 우리 일상의 모든 부분들 안에서 마찬가지로 영의 차원, 영적인 삶, 영성을 살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이 곧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1코린 10,31)
민범식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서품을 받았으며 로마 그레고리오대학에서 영성신학 박사와 심리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