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활동에 뛰어 드는 일은 늘 위험과 고난이 뒤따른다. 그러나 그 사명의 막중함과 파견자의 지시로 볼 때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다. 편안한 여행, 여행 중에 입고 먹는 것 등은 하느님께 맡기고 오로지 하느님 나라 전파에만 마음을 써야 한다. 가는 길에서 누구와 인사하느라고 긴 시간을 낭비할 여유가 없다.
전교여행을 떠나면서 여행에 필요한 용품 등을 준비하여 가지고 다니지 말라고 금지하셨다. 그것은 전교에 파송된 제자들의 가난한 생활을 강조하신 것으로 전통적으로 해석되었고 또 그 견해가 옳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금지된 품목들을 살펴 볼 때 다음과 같은 상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여기서 나열된 여행 품목들이 구약성서에는 한 군데에 나온다. 즉 기브온 주민들이 여호수아의 침공을 두려워하여 그를 찾아가 화평조약을 맺으려고 속임수로 너절너절한 부대와 다 터져서 기운 헌 가죽부대, 닳아빠진 신, 낡은 옷, 말라서 사박사박한 빵을 가지고 가 여호수아의 동정을 얻고 조약체결에 성공했다는 이야기가 있다(여호 3,3이하). 예수의 제자들은 전교여행을 떠나면서 이러한 가장된 행세를 해서는 안되며 차라리 무엇을 지니고 다녀야 할까 마음조차 쓰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당시의 견유학파 철학자들은 가난을 미덕으로 삼아 자기들의 철학성을 전파하기 위하여 한 벌 옷을 걸치고 지팡이와 구걸할 돈 주머니와 식량자루만을 지니고 다녔는데 예수의 제자들은 그와 같은 행세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먹지도 말고 입지도 말라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하느님 나라의 일꾼이니만치 그 공동체에서 마련하는 대로 먹고 살면 된다.
어쨌든 간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여 주신 훈시는 곧 바로 예수님 자신의 생활태도를 반영한것으로 모름지기 예수의 제자들은 물질생활에 있어서는 주님의 모범을 따라야한다는 것은 확실한 일이다. 그런데 루가복음서에서 12제자를 파송할 때의 훈시와 72제자를 파송할 때의 훈시가 그 내용에 약간의 차이가 있고 또 공관삼 복음서끼리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구체적으로 확인해 본다.
루가의 72제자 파견대목에서는 길을 떠날 때에 식량자루, 돈주머니, 신을 가지고 다니지 말라고 했고 (10장4)12제자를 보낼때에는 신은 빠지고 지팡이와 빵과 두벌 옷이 덧붙여 금지되었다. 그러니 이 두 경우를 종합하면 금지된 물품은 식량자루, 지팡이, 빵, 돈(주머니), 옷, 신, 이렇게 6가지이다. 이것을 마태오와 마르꼬의 경우와 비교해 보면 : 금지된 물품은 루가(9, 3 : 10, 4)에서는 지팡이, 식량자루, 빵, 돈(주머니), 두벌옷 신. 마르꼬(6, 8)에서는 식량자루 빵, 전대, 두벌옷(샌달은 허용). 마태오(10, 9)에서는 지팡이, 식량자루(빵이 빠짐) 금은과 전대, 두벌옷 신.
이렇게 되는데 그 차이점에 무슨 의미를 부여하여 주석하는 학자도 있으나 한 마디로 사명을 띤 여행을 하면서는 육신상 걱정을 버리라는 뜻으로 알아듣는 것이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꾼은 먹고 살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마태(10, 9):루가10, 7:고린전9, 14:디모전5, 18).
다음은 제자들이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의 취해야 할 태도들을 상세히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이 훈시는 제자들에게 예의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초대 사도교회가 형성되던 때의 상황을 뒤에 깔고 있다. 교회는 마을이나 도시를 중심으로 그 활동범위를 정했고 그 도사니 마을에서 합당한 집이 오늘의 성당구실을 하였다.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에서 고린토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그 도시에 있는 아퀼라와 프리스카의 집을 교회라 불렀다(고린전16, 19).
마태오 복음서에서 어느 도시나 마을에 가거든 누구의 집이 머물 수 있는 집인지 잘 살핀 다음 들어 가고 일단 들어 간 다음에는 그 곳에 머물러 있으라고(10, 11)한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집에 들어 가거든 「이 집에 평화」라는 인사를 하라고 했는데 이것은 당시 유대아인들의 평상적인 인사로서 「샬롬」이라고 한다. 이 평상적인 인사를 파송임무에 부과한 것은 예수께서 부활후에 제자들에게 빌었던 평화의 인사가 성령의 효과를 나타내고 그들이 복음의 평화를 받았던 것처럼 세속적 인사에서 내면적으로 그리스도 교화한 축복의 인사이다. 이 말은 그 후부터 교회의 전례에 도입되어 신자들이 모일 때마다 서로 교환한 내적인 기쁨의 표시였다. 이 축복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평화의 아들」이라 했고 이들은 구원을 받은 사람을 말한다. 축복을 거절하는 사람은 복음을 거절하는 사람으로 구원대신 저주를 받을 것이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서는 먹고 사는 것으로 족하고 그것은 일꾼의 품삯으로 당연하다. 그러나 그 외의 것을 탐해서는 안된다.
이집 저집, 또는 이 동네 저 동네로 옮아 다니지 말라는 훈시는 이러한 뜻으로 해석된다. 그것은 거저 받은 것이니 거저 주라(마태10, 8)는 훈시에서 드러났다.
거저 줄 것은 병자를 고쳐주고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는 일이다. 병을 고쳐준다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임재를 표징으로 나타낸다. 하느님나라의 임재는 예수와 그가 위임한 제자들의 현존을 말한다. 그 모습은 예수와 그 제자들을 통해서 인간에게 임한 실체이다. 하느님 나라가 눈앞에 보이게 임재했는데도 이를 거부하는 동네는 저주를 받는다.
그 동네에서 묻은 먼지를 털어 버리고 떠나라고 했다. 유대아인들은 이교도들의 땅을 떠날 때 발에 묻은 먼지를 털고 성지로 들어왔다. 이교도들을 저주하는 표시였다. 여기서는 복음을 거부하는 도시에 대한 심판의 표시이다. 그들은 소돔보다도 더 심한 응징을 받을 것이다(소돔의 벌에 관하여는 이사1, 9~10 : 창세19, 24~28). 제자들을 배척하는 것은 예수를 배척하는 것이고 예수를 배척하는 것은 하느님을 배척하는 것이다. 제자들의 파송은 하느님의 파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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