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초기는 중세의 출발점인 서구의 그리스도교 제국과 그것을 함께 통치하게 될 교황권과 황제권의 기반이 형성되는 시기를 말한다. 이 일은 보니파시오와 피핀에서 시작되어 카알 대제에 이르러 완성된다.
■ 교황직과 프랑크 왕국과의 제휴
8세기 중엽 사라센, 비잔틴, 게르만, 이렇게 세 세력의 판도가 뚜렷해진다. 그중에서 서구의 게르만 세력이 가장 약했다. 그런데 이태리와 로마가 북이태리의 랑고바르디인들로부터 자주 침입을 받게된다. 교황은 비잔틴 황제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도와주지 않았다. 무능해서 도와줄 수도 없었다. 이에 교황은 프랑크 왕국에 호소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간 프랑크 왕국도 강력한 국가로 성장되었다.
프랑크 왕국은 유명무실해진 왕을 대신해서 실권자인 궁정 집사가 통치하고 있었다. 궁정 집사 카알 마르텔은 732년 서구로 침입해온 사라센의 공격을 프와티에에서 저지함으로써 사실상의 왕이 되었다. 739년 랑고바르디인이 로마를 포위했다. 이때 레오 3세가 카알 마르텔에게 처음으로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거절 당했다. 마르텔의 아들 피핀은 751년 왕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프랑크 왕이 되었다. 이로써 메로빙 왕조가 망하고 가롤링거 왕조가 시작되었다. 이 무렵부터 교황에 대한 태도가 호의적으로 변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보니파시오의 노력의 결과였다. 그는 프랑크 교회의 조직과 개혁을 통해 지방 국가교회에 불과했던 프랑크 교회들을 로마교회에 결합시킴으로서 교황의 권위를 향상시켜 놓았었다.
자카리아 교황은 752년 보니파시오로 하여금 피핀을 왕으로 도유(塗油)케 했다. 753년 랑고바르디족이 라벤나를 점령하고 로마를 위협했다. 교황 스테파노 2세는 이번에도 비잔틴으로부터 도움을 기대할 수 없게 되자 피핀에게 도움을 청했다. 피핀은 교황을 자기 왕국으로 초청하고 거기서 754년 교황과 만나 협상했다.
여기서 교황과 프랑크 왕국간의 연대 동맹이 이루어졌다. 피핀은 교황과 로마 백성을 보호하고, 랑고바르디족을 라벤나로부터 철수시킬 것을 약속했고, 한편 교황은 직접 피핀을 왕으로 도유하고 또 그에게 「로마 귀족」의 칭호를 주었다. 이것은 로마교회를 보호할 임무가 비잔틴에서 프랑크 왕에게로 넘어갔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피핀은 약속대로 랑고바르디족을 라벤나에서 물리쳤다. 그러고는 정복한 지역과 중부 이태리를 756년 성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에게 기증했다. 「피핀의 증여」로 불리는 이 기증으로 교황령(敎皇領), 교황국가의 기초가 놓여있다. 이것을 법적으로 또 문서로 뒷받침하고자 이무렵 이른바「콘스탄티누스 증여 문서」가 작성되었다. 이 문서는 이미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당시 실베스텔 교황에게 서로마제국의 통치를 위임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것은 전설에 불과했었고 결국 위작이었음이 그후 15세기에 판명되었다.
랑고바르디인들이 다시 로마로 진격해왔다. 그래서 피핀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카알에 이르러 완전히 실현될 수 있었다.
■ 서구제국의 재건
서구 중세의 최고의 지배자인 카알 대제(768~814)에 이르러 보니파시오와 피핀이 시작한 프랑크 국가와 교황직을 결합시키는 사업이 완성된다.
그는 우선 북이태리의 랑고바르디 왕국을 정복하고 부왕(父王)의 증여 약속을 새롭게 하고 기증을 확대하면서 787년 교황령을 확정지었다. 마침내 교황령이 탄생했다. 교황령은 1870년까지 11세기 동안 교황직 발전의 기초가 되어 교황의 교회적ㆍ정치적 독립을 보증하는데 기여했다. 그러나 교회적 종교적 사명을 위해서는 무거운 짐이 되기도 했다.
카알은 철저한 그리스도교적인 황제였다. 그는 아우구스티노의 신국(神國) 이상에 고취되어 그의 제국을 그리스도교화하려 했다. 그는 위대한 정복가로서 제국의 영토를 전 서구로 확대시켰는데, 그 정복도 실은 사라센인이나 외교인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는데 있었다.
그는 교회를 외적으로 방어하고 보호했을 뿐만 아니라 내적으로 교회를 쇄신하고 발전시켰다. 그의 활동이 교회와 종교 영역에서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종교적 신념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그러므로 당시 그런 개입을 불평한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교리개혁의 일환으로 그는 주교들에게 교회회의를 개최하고, 교구를 방문할 것을 요구했고, 교구 사제들에게는 공동생활을, 수도자들에게는 베네딕도회칙을 의무화했다. 또 전례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로마전례로 전례의 통일을 시도했고, 그레고리오 성가를 장려했다.
또한 교육과 문화의 부흥을 중시하고 모든 본당, 특히 수도원과 주교좌성당에 부설 학교를 반드시 설립케 했다. 자신도 알퀸 같은 유명한 교사들을 외국에서 초빙하여 왕궁에 최고의 학교를 세웠다.
도 수도원에 도서관을 설치하여 고대 고전들을 베껴 소장케 했다. 이리하여 로마 문화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문화, 즉 카롤링거 문예부흥이 시작되었다. 카알은 무엇보다도 서구에 게르만인에 의한 로마제국을 재건하고 거기에 그리스도교적 성격을 띄게함으로써 서구중세의 기초를 놓았다.
교황 레오 3세가 로마 귀족들의 반란으로 곤궁에 처하자 카알은 직접 로마로 가서 그들을 물리쳤다. 그러고는 8백년 성탄절, 베드로 대성전에서 레오 교황으로부터 로마 황제로 대관되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다.
그것은 동방과 서방이 결정적으로 2개의 제국으로 분리되었음을 의미했다. 또 교황에 의해 대관된 황제가 교황에게 예속됨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것은 교황의 생각이었고 황제들의 생각은 아니었다. 여기서 이후 양자사이의 많은 알력이 발생하게 되었다. 카알 대제는 의심없이 세계사의 주요 인물인 동시에 위대한 그리스도교 황제이다. 그가 교회의 모든 일에 개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지향은 종교심에서 우러나온 순수한 것이었다. 그는 매일 미사에 빠지지 않을 정도로 열심했다. 그의 성격상의 많은 결함이 있었다고 해서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의 역사적 위대성까지 부인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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