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알 대제가 사망하자(814) 그가 물려준 제국은 걷잡을 수 없이 분열되어 가면서 결국 카톨링거 왕조가 멸망한다. 황제의 보호 세력을 잃은 교황직은 암흑시대를 맞게된다. 그것은 2세기 동안이나 지속된다(867-1046). 이 긴 세월 동안 교황직이 내내 로마 귀족들의 지배를 받으며 굴욕을 당하지만 962년부터는 그 양상이 크게 달라진다. 왜냐하면 이때 독일제국이 탄생하면서 교황직에 문제가 있을 떄마다 황제들이 개입, 교황직을 위기에서 구해내기 때문이다. 이때부터는 독일 황제들이 교황직을 지배하게되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당시 교황직을 위해서는 필요하고 유익한 것이었다.
■ 교황의 암흑시대
교황의 암흑 시기가 시작되기 직전에 교황권이 잠시 상승했던 사실을 먼저 지적할 필요가 있다. 특히 니콜라오 1세(858-867)같은 이는 이미 중세 초기에 교황의 정치권력을 요구했고 또 그 이념이 그레고리오 2세 교황에게 이어지기 때문에 그 의의가 크다.
니콜라오 교황은 국왕의 이혼을 금하는 등 교황이 제왕의 윤리생활에 간섭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했다. 또 그는 대주교나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의 월권행위에 강력히 대항함으로써 교황의 수위권을 관철시키고 확립했다.
이 무렵 교황의 이러한 최고 권력의 법적 근거를 뒷받침하는「가(假) 이시도로 교회법령집」이 작성되었다. 이것은 대부분이 위조되었거나 변조된 교황들이 서한과 법령들을 모아 놓은 것인데 15세기에 가서야 그것이 가짜임이 판명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법령집은 전 중세를 통해 교황권을 강화하는데 자주 활용되면서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니콜라오 1세 교황의 사망과 더불어 교황직의 무서운 침체가 시작된다. 제국이 붕괴하자 로마는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이 무렵 이태리는 사방에서 위협을 받고 있었다. 사라센인들이 남쪽 시칠리를 점령하고는 로마까지 침입 성 베드로 대성전을 약탈해 갔다(846). 또 동쪽에서는 항가리가, 북쪽에서는 노르만족이 국경을 위협하고 있었다. 상황이 이러할때 로마에서는 귀족들이 판치고 있었고 교황직은 그들의 정권싸움의 노리개가 되어 버렸다. 그들은 교황을 임명하고 파면하고, 죽이고 투옥하는 등 교황직을 가지고 놀았다. 그래서 교황직은 그 보편성을 잃고, 1개 교구로 전락해 버렸다.
교황직이 얼마나 무능했던지 그후 여자교황의 전설까지 생겼다. 즉 요안나란 독일의 한 여성이 남장을 하고 2년간 교황 노릇을 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죽은 교황의 시체를 파내 재판을 한 이른바 시체재판이란 끔찍한 사건까지 있었다. 포르 모수스 교황(891-6)은 당시 로마를 지배하던 스폴레토파에 대항하고자 독일왕과 제휴했었다. 그런데 교황이 사망하자 이들은 다음 교황에게 그 시체를 파내 재판할 것을 요구했다. 교황은 그들의 요구대로 따랐고, 시체는 티베르 강에 버렸다.
이어 루스쿨룸파가 로마 정권을 장악했다. 그들은 그들 가족 중에서 6명을 교황 자리에 앉혔다. 드디어 16세의 요한 12세가 교황이 됨으로써 교황직의 퇴폐는 극에 달했다. 그는 방탕한 생활로 나날을 보낸 역사에서 가장 형편없는 교황이 되었다. 그는 로마 귀족들에게 시달린 나머지 오토 1세를 로마로 오게했다. 오토는 로마로 와서 교황을 귀족들의 정치 싸움에서 구해냈다. 이떄부터 교황은 독일 황제들의 보호와 지배를 받게된다.
■ 로마제국의 재건과 교황직
카롤링거 왕조가 멸망했다. 그러나 독일의 작슨 왕조가 일어나면서 독일왕국이 탄생했고, 962년 오토 1세가 로마에서 교황으로부터 황제로 대관됨으로써 마침내 카알의 제국이 재건되었다. 당시 로마인들은 로마왕국과 그리스도교 세계를 하나로 생각했다. 그래서 이 제국이 신성로마제국으로 불리게되었고 훨씬 후에 독일제국이란 이름이 첨가되었다.
오토 대제는 침략을 막아내고 무엇보다도 헝가리를 정복함으로써 제국으로 발전할 기반을 닦아놓았다. 그는 또 주교들을 제국의 영주로 만들어 왕권을 확고하게 만들었다. 주교들은 독신이고 후사가 없었으므로 오토의 예측대로 정권의 야욕을 갖지 않고 왕권의 충실한 지지자가 되어 주었다.
오토도 카알처럼 제국과 교회를 하나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교회를 국가화하지 않고 도리어 국가를 교회화 하려했다. 여기서 종교와 정치가 긴밀히 융합되어 일종의 정치적, 종교적 통일 문화가 조성될수 있었다. 이로 인해 교회 특히 독일교회에 새로운 도약을 초래했다. 독일에서 이때처럼 많은 성인 주교들이 나온 적이 없었다. 그들은 신(神)과 세상을 하나로 생각했고 그래서 그들의 종교적 임무(목자)와 정치적 임무 (영주)를 기묘하게 조화시켜 두 임무를 다 잘 해냈다. 수도원에서도 예술과 문화의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오토 르네상스).
오토를 위시해서 독일 황제들은 진심으로 교회를 걱정했다.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로마교회의 보호자가 되었다.
오토 대제가 한 것처럼 그의 후계자들도 교황들이 로마 귀족들에게 괴롭힘을 당할 떄마다 이태리나 로마로 원정을 하고 교황들을 위기에서 구해냈다.
1044년 로마에 또 반란이 일어났다. 이떄 크레센시우스파와 루스쿨룸파는 저마다 대립교황을 세웠다. 교황이 3명이 됨으로써 혼란이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자 독일 황제 하인리히 3세는 로마로 와서 수트리로 교회회의를 소집하고 3명의 교황을 모두 폐위시키는 동시에 독일인 글레멘스 2세를 새 교황으로 선출시켰다. 이로써 교황직이 붕괴 직전에서 구출되었다. 교황의 선출에 있어서 황제권력이 이때처럼 우세하게 드리난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1046년은 한편으로는 최하의 교황권의 몰락, 또 한편으로는 최고의 황제권의 상승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두 권력의 전환점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이제부터 교황권은 상승하고 황제권은 기울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황제권의 우위 시기인 중세초기가 막을 내리고 교황권의 우위시기인 중세 전성기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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