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聖枝)를 흔들며 환호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어서 빨리 오시라고. 누구보다 더 열심히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왔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무릎이 꺾였다. 다시 일어설 용기를 주십사 기도했다. 회심의 시간…. 부활 축제에 동참하기 위해, 마지막 힘을 내 수난과 유혹의 터널을 헤쳐 나간다.
■ ‘실패, 다시 시작하기’ - 남승현 수습기자
담배를 피웠다, 말도 안돼!
주님, 마지막까지 힘을 주세요
담배를 피웠다. 실패다. 남들은 “무슨 큰 이유가 있었을 거야”라고 할 수도 있지만, 냉정히 돌아보면…. 아무런 이유가 없다. 너무나 쉽게 무너졌다.
보건복지부는 금연길라잡이 홈페이지를 통해 ‘재흡연의 가능성이 있는 네 가지 경우’를 제시했다. 배고픔, 화남, 외로움, 피곤함이다. 나의 경우 한 가지도 속하지 않는다. 밥도 든든하게 먹었고 화날 일도 없었으며 혼자였지만 외롭지 않았다. 피곤할 만큼 바쁜 날도 아니었다. 모든 것이 괜찮다고 생각할 때 유혹은 불쑥 찾아왔다.
금연 기간이 길어질수록 의지가 약해지는 것을 느낀다. 육체적 금단증상은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정신적 금단증상이 시작됐다. 그러자 ‘이 정도 참았으면 한 대 정도 괜찮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순 막바지, 퇴근 후 집으로 가는 길. 보는 사람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었다. 담배 한 갑을 사들고 골목으로 들어갔다. 입에 한 대 물어 불을 붙이니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이성의 끈을 놓아버렸다. ‘바로 이 맛이야!’ 잠자고 있던 몸의 세포들이 모두 깨어나는 기분이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후회가 밀려왔다. 금연 도전은 오로지 내 건강을 위해 시도한 건 아니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에 동참하는 것은 포기할 수 없는 것을 내려놓는 것이었다. 이 ‘내려놓음’을 통해 이웃사랑의 결실을 맺는 것이다. 그런데 온전히 내려놓지 못했다. 절주, 취미생활, 식사 후 바로 양치하기, 물 많이 마시기 등 여러 시도를 했지만 정작 중요한 내 의지는 잡지 못했다.
남아 있는 19개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내 머릿속에 달력이 그려졌다. 이제 주님 수난 성지주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미다. 끝이 선명해지는 시간, 다시 시작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우선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금연에 실패한 동지들의 안타까운 사연들을 살폈다. 담배 피는 꿈을 꾼 사람도 있고 3년 동안 금연에 실패해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사람, 5년 동안 금연하고 다시 담배를 피우는 사람 등 모습도 각양각색이었다.
다시 용기를 얻어 남아있는 담배를 모두 두 동강내버렸다. 그러나 1분도 지나지 않아, 아까운 마음이 들어 담배 개비를 테이프로 이어 붙였다. ‘대체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지만 나는 한 대를 더 피웠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되돌아오는 악령의 비유’가 이런 상황일까. “더러운 영이 사람에게서 나가면, 쉴 데를 찾아 물 없는 곳을 돌아다니지만 찾지 못한다… 자기보다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마태 12,43-45)
흡연의 유혹에 넘어가니 좌절과 포기의 유혹이 속삭였다. 이집트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에서 슬퍼하고 좌절했다. 그 결과 40년 동안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희망을 가져본다.
■ ‘가난에 공감하기’ - 성슬기 수습기자
하필 왜 이 도전을 선택했을까…
이제 알 것 같다, 무엇을 바라시는지
가슴이 철렁!
스마트폰 액정 화면이 산산조각 났다. 하필 사순 도전 기간에 말이다. 곧장 가장 가까운 A/S센터로 달려갔다. 순서를 기다리는데 심장이 벌렁거렸다. 수리비가 얼마나 나올지 걱정됐기 때문이다. 여태 아등바등 돈을 아껴온 내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아니나 다를까 수리비는 20만 원을 훌쩍 넘어섰다. 다행히 보험을 들었고 통신사 포인트 결제도 가능해 현금은 3만 원 정도 지출했다. 그래도 속이 쓰렸다. 이제 일주일만 버티면 부활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데 말이다.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예상치 못한 지출에 당황스럽기만 했다. 지난 한 달 넘게 약 24만 원으로 살아가기 위해 ▲식비 ▲교통비 ▲의복·미용비 ▲모임비를 줄이기 위해 얼마나 안간힘을 썼는데….
하지만! 도전에 실패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남은 돈은 2만 원 남짓. 이 돈만으로 성주간을 제대로 살아보기로 했다. 기도로 굶주린 배를 채워보리라. 40일간 광야에서 수난 당하시면서도 유혹을 물리치신 예수님을 따를 용기,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그 용기를 다시 끌어내본다.
‘왜 내가 이 도전을 해야 하는가?’ 이번 도전을 시작하고 나서 늘 머릿속에 맴돌던 질문이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예수님께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물어왔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라”는 응답을 얻었다. 하느님께서는 단순히 내가 돈을 적게 쓰는 걸 원하시지 않는 것 같다. 대신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을 듣고 공감하길 바라셨다.
내가 실패 혹은 부활의 문턱에서 포기하지 않고 버텨온 이유는 ‘희망’이 있어서다. 부활 시기가 되면, 보고 싶었던 친구들을 만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기쁨을 누리겠다는 그런 작은 희망이었다. 하지만 매일 가난 속에서 허덕이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절감하니, 나도 모르게 물질적인 기쁨만 찾고 또 그것을 누리기 위해 애써온 모습들이 부끄러워졌다. 가난한 이들이 갑작스럽게 아프거나 돈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얼마나 막막한 심정이 들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가난한 교회’를 몸으로 실천하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도 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다른 이들의 고통에 공감할 때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을 들을 수 있다”면서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어쩌면 하느님께서는 어린 시절 마음으로 돌아가길 바라시는 것 같다. 결핵 환자를 돕기 위해 해마다 크리스마스 씰을 샀던 마음, 하느님과 가장 가까이에 있고 싶어 복사를 섰던 모습을 기억하시고는 말이다.
주님은 우리가 부족해도 가난해도 아파 신음할 때도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했다. 그 사랑을 받으며 자라온 내가 이제는 베풀어줄 차례다.
이번 부활 시기에는 아주 값진 선물을 받을 것 같아 벌써부터 설렌다. 우물 안이 아니라 더 넓은 하느님 나라로의 초대 말이다.
■ ‘쓰레기는 더 이상 쓰레기가 아니다’ - 권세희 수습기자
안입는 옷으로 만든 핸드폰 꽂이
짠~ 쓸모있는 물건으로 재탄생했다
남 주기는 아깝지만 내가 갖기도 아쉬운 것. 누구나 그런 물건 하나쯤은 있을 거라 생각한다. 입지는 않지만 괜히 버리기는 아까운 티셔츠라든지, 유행이 지난 가방 같은 것들 말이다. 그래서 버리기도 아쉽고 사용하기도 아쉬운 물건들을 리폼(reform, 낡거나 오래된 물건을 새롭게 고치는 일)해 사용해보기로 했다.
인터넷포털사이트에서 ‘쓰레기 재활용’을 검색하자, 다양한 재활용 방법들을 찾을 수 있었다. 내가 선택한 자료는 환경부 공식 블로그 ‘자연스러움’에 게재된 ‘재활용 DIY’(Do it yourself, 소비자가 원하는 물건을 직접 만들도록 한 상품)다. 다양한 종류의 재활용 방법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재활용품을 만드는 과정도 자세하게 서술돼 따라 하기 쉬워보였다. 꾸미고 만드는 것을 좋아해서 재활용 DIY를 시작하려고하자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과장해서 마치 새 물건을 사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동생은 만들다가 실패하면 또 쓰레기가 생기는 게 아니냐고 불신의 눈빛을 보냈지만 말이다.
주변의 우려 속에서 내가 선택한 물건은 바로 ‘핸드폰 꽂이’였다. 아무리 ‘재활용’이 의미가 있어도 손이 가는 제품을 만드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목적은 좋았으나 어떤 옷을 활용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막상 재활용하려고 보니 언젠가는 입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옷 유행은 10년마다 온다던데…. 지금 이걸 재활용하면 그때 못 입는 거 아닐까?’ 또는 ‘입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너무 섣부르게 결정하는 건가…’
평소에는 거들떠보지 않던 옷들이 갑자기 예뻐 보이고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결국 큰마음을 먹고 반팔티셔츠와 재킷 안감을 활용했다. 눈으로 볼 때는 쉬워보였는데 막상 바느질을 시작하니 수없이 난관에 부딪혔다. 몸통을 만들 천과 핸드폰이 들어갈 윗부분을 만드는 게 어려웠다. 특히 두 개를 이어 붙여 하나로 만드는 게 난해했다. 좌충우돌하면서 만들어놓고 보니, 어색하긴 해도 내가 직접 만든 물건이라는 애착과 함께, 재활용한 물건이라는 뿌듯함이 두 배로 느껴졌다.
‘이 맛에 재활용을 하는구나.’
예전에 본 ‘재활용 트리’도 다시 떠올랐다. 깔끔한 새것은 아니었지만 소박한 아름다움을 품은 트리였다.
이번 사순체험을 하면서 ‘재활용’의 가치를 다시 돌아보게 됐다. ‘쓰지 않는 물건을 사용할 물건으로 만드는 것’ 재활용을 통해서 쓰레기뿐 아니라 불필요한 소비도 줄일 수 있었다. 가령 핸드폰 꽂이를 샀으면 5000원 이상 지출했을 것이다. 반면 실과 반짇고리만 있으면 500원에 만들 수 있다. 이제야 프란치스코 교황의 생태회칙 「찬미받으소서」에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에 대하여 인간이 저지른 피해를 복구하려면 모든 이의 재능과 참여가 필요합니다”라는 구절이 와 닿았다. ‘참여’한다는 것은 생태와 보전을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생활 속에서 행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실행한다는 의미’라는 걸 느낀다. 고되기만 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이번 사순 시기는 나와 그리고 우리 가족에게 많은 것을 선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