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사랑과 섭리를 느끼는 삶은 매우 중요하다. 여기에서 내면의 평화가 촉진되고 인격적 성숙이 뒤따른다.
일상의 무덤을 넘어 믿음과 희망 가운데 복음적 생활로 진보하는 전인적 태도를 지닌다. 예수님처럼 세상의 치유와 구원을 고대하는 마음이 생동할 때 삶의 주변까지도 관상하며 기도하게 되고, 이에 맞갖은 태도를 지닌 그분의 제자로서 행동하는 삶으로 변화된다. 곧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주님의 기도에서 예수마음을 읽었듯이, 기도할 때마다 그 의미들을 묵상하고 마음에 새김으로써 내면에서 샘솟는 영적 시원함과 용기를 마시게 된다. 비로소 일상을 관상하는 영적 생활에 들어선다.
옛 교리문답에서는 “사람이 무엇을 위하여 세상에 났느뇨? 사람은 하느님을 알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해 세상에 났느니라”하고 명확히 가르쳤다. 그렇다. 그리스도인 삶의 목적은 하느님을 알아 섬기고 사랑하며 자기의 영혼이 영원한 생명과 참 행복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생활은 그리스도의 마음(성령)으로 힘을 얻고 성령에 이끌려 ‘완전한 사랑’에로 나아가게 된다. 하느님의 부르심 안에 살아가는 것이다.(마태 5,48 참조)
등산을 생각해 보자. 정상에 오르자면 등성이를 탈 수도, 골짜기를 건널 수도, 능선을 돌아갈 수도 있다. ‘하느님과의 일치’ 곧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도 다양하다. 신앙을 기초로 하는 삶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여정이므로 말씀과 성사를 통하여, 활동과 봉사의 공동체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 쇄신으로 성숙해 간다. 자연스럽게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이 된다.
신앙생활을 성소(聖召)로 이해할 때 신앙의 성사들은 하느님의 선물로 자리하게 되는데, 이때에 참된 신앙은 세상과 교회에서 ‘무엇을 하는가?’ 보다 ‘무엇을 어떻게 하는가?’ 라는 내적인 태도, 즉 하느님의 사랑을 닮으려는 내적 지향과 맞물린다.
올바른 신앙의 정서를 바탕으로 그 깊이를 맛들이기 시작하면 하느님께 ‘무엇을 봉헌할까? 어떤 활동으로 그분께 나아갈까?’에 주목하게 된다.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피조물들의 창조자이신 분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셨음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다. 사랑 자체이시기에 당신 손수 만드시고 돌보시고 완성하신다는 것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다. 두려움과 절망 속에도 사랑이신 분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며 끊임없이 선포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부르시는 하느님의 사랑은 제자로 하여금 자유로운 의지로 자신의 희생을 이웃과 나누게 하신다. 때문에 제자는 부르신 분을 만나는 체험에 머문다.
하느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경이로운 세상 안에서 펼쳐지는 하느님의 뜻과 육화하신 말씀에 일치하여 기도하게 된다. 오늘을 살아가는 제자는 복음서를 통해 만나는 예수님의 마음과 정신, 행동양식을 끊임없이 체득함으로써 그 정체성을 지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로 시작된 하느님 체험의 여정이 하느님 안에 머무는 삶이다. 여기에서 피조물들의 치유와 회복은 부활을 향한다. 바로 주님의 기도에서 드러난 기도의 정신에 부활의 영성이 담긴 배경이다. 예수님의 온 마음과 혼이 담겨 있는 절박한 이 기도를 우리의 전인적 완성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요한 3,16 참조)이라 고백할 수 있다.
독자들께서도 “아빠! 아버지!”(갈라 4,6) 하시는 ‘주님의 기도’와 함께 성령께서 주시는 영적 기쁨과 지혜를 누리시길 빌며, 열 차례에 걸친 지면 연재를 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