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리외 베르나르도 루도비코 성인은 가장 어린 나이로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로,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열정적으로 전교하다 순교했다.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사로 조선에 온 성인은 한국 이름을 서몰례(徐沒禮)로 정해, ‘서 루도비코’라고 널리 알려졌다. 성인이 조선에 도착한 때는 1865년 5월. 당시 성인의 나이는 불과 26세로,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 중 가장 어렸다.
성인이 그토록 이른 나이에 선교에 뛰어든 것은, 어릴 적부터 키워오던 동양 선교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다. 성인은 1840년 10월 8일 프랑스 보르도교구의 랑공에서 태어났다. 성인의 모친은 결혼 5개월 만에 남편이 세상을 떠났고 이후 성인이 태어나자, ‘아들을 성모께 봉헌’하기로 마음을 먹고 그를 정성껏 길렀다.
이에 성인은 7살부터 복사를 하며 성소를 키우고, 9살이 되던 해에 소신학교에 입학했다. 소신학교에 입학하던 때, 성인은 중국에서 선교한 경험이 있는 사제로부터 중국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동양 선교에 대한 꿈을 키워나갔다.
1857년 대신학교에 입학한 이듬해 모친을 여읜 후부터, 전교를 향한 마음은 더욱 열렬해졌다. 하지만 교회법상 연령 미달로 사제서품을 받지 못했기에 선교사제로 나갈 수 없었다.
그런 중 성인은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성인이 신학생으로 있던 보르도교구는 당시 신학생들이 교구 밖에서 활동하지 않도록 하고 있었지만, 성인에게만큼은 선교를 위해 출국할 수 있도록 허락해줬던 것이다.
마침내 1864년 5월 21일 사제서품을 받은 성인은 도리 신부, 브르트니에르 신부, 위앵 신부와 함께 조선의 내포지방으로 입국했다.
성인은 입국 후 광주군 대왕면 둔토리(현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 교우촌과 뫼루니(현 성남시 분당구 운중동) 교우촌을 오가며 우리말을 공부했다. 박해가 심하던 시기였기에 상복을 입어 위장해 이동했고, 어둡고 습한 산속의 동굴을 거처로 삼기도 하면서 은밀히 생활해야 했다. 성인은 낮에는 숨어서 언어를 배웠고, 밤에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산에서 내려가 신자들을 방문했다. 아직 언어도 문화도 익숙하지 않았지만, 박해 속에서 사제의 보살핌 없이 신앙을 지키는 신자들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열정 덕분에 성인은 1866년 2월 경에는 고해성사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말을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이에 베르뇌 주교는 성인을 충청도 지방에서 활동하도록 임지를 정해주려 했다. 하지만 성인은 자신의 임지에 가보기도 전에 체포되고 말았다. 배교자의 밀고로 임지에 가기 전 머문 집에 포졸들이 들이닥쳤던 것이다.
성인은 고문 속에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신앙을 증거했다. 마침내 성인은 1866년 3월 7일 새남터의 형장에서 참수됐다.
■ 성인 발자취 만날 수 있는 곳 - 둔토리동굴, 하우현성당, 분당성요한성당
루도비코 볼리외 성인이 숨어 지내던 청계산의 둔토리 동굴. 가톨릭신문 자료 사진
청계산 국사봉 부근의 둔토리동굴(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운중동 산 63-1)은 성인이 박해를 피해 숨어 생활했던 동굴이다. 현재 동굴에는 현양비와 십자고상 등을 세웠고, 성남대리구 분당성마태오본당이 관리하고 있다.
청계산 자락에 있는 안양대리구 하우현본당(경기도 의왕시 원터아랫길 81–6)은 성인을 두 번째 주보성인으로 삼고, 성인의 기념비와 동상을 세워 현양하고 있다. 성남대리구 분당성요한본당(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서현로 498)은 성인이 머물던 뫼루니 교우촌에서 이어져오는 본당이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