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운동 이후 분열된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띤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정통 가톨릭 신자들을「교황주의자」처럼 오해하였다.
지역 교회에서 주교들의 역할과 권위를 평가절하하고 밑에는 신자들이 떠받치고 있으며 맨 꼭대기에는 교황이 있는 피라밋 형태처럼 교회 구조를 생각하고 교황에게 거의 우상적인 경탄만을 보내면서 로마 교황과 구원을 연결시킬 정도로 생각하여 교황 지상주의(敎皇至上主義, Ultramontanismus)를 지지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할 수 있겠다.
교황지상주의자란 프랑스에서 갈리아주의, 얀세니즘, 국가교회주의에 대항하여 로마 사도좌(使徒座)의 권위와 권리를 옹호하는 운동으로서 역시 유럽의 다른 여러 나라에서 로마 교황의 권위와 다스림에 온전히 순명하고 국가교회나 지역교회의 독립성을 반대하는 사상이었다. 19세기에 본격화된 교황지상주의에는 3가지의 근원적인 동기가 있었다.
1, 교회에서 교황의 권위를 축소하려는 경향이 중세 말기부터 형성되었지만 특히 프랑스의 루이 14세 왕 치하에서 더욱 촉진된 갈리아주의의 반작용으로 생겨났다. 법과 권력으로 교회기관을 통제하려고 한 대부분의 정부가 성직자들에게서도 발견된 갈리아주의적인 이러한 태도를 고무시켜 이용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갈리아주의의 과격함이 교황지상주의라는 정반대의 경향을 강화시켰을 뿐이었다.
2, 프랑스 교회를 질식시킬 정도로 위협한 혁명적인 열풍이 정통적인 가톨릭 신자들을 매료시키는 교황을 구세주처럼 드러나게 하였다. 교황령(敎皇領)의 실지(失地)로 비오 6세, 비오 9세 교황이 당한 시련들이 교황의 모습을 더욱 중요하게 확대할 뿐이었다.
1802년의 정교조약(政敎條約)에 따라 세속 권력에 의해 주교들이 임명되는 한, 가장 훌륭한 주교들이 선택되리라고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자연적으로 교황의 중요성과 교회의 중앙 집권화가 정당화되고 강화되었다.
3, 마지막으로 요셉 메스트로(Joseph Maistre)처럼 전통주의적인 보수주의자나 펠리시떼 드 라므네(Felicite de Lamennais)처럼 자유쥬의적인 가톨릭 신자들까지 포함하여 지성적이고 정치적인 교황지상주의가 형성되었다.
전자는 신앙의 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적인 영역에서도 교황의 권위를 하나의 규범적인 차원으로 간주하였고, 후자는 세속 권력의 비그리스도교회에 이의를 제기하기 위하여 성좌에 호소하였지만 교회 내에서는 최상의 규범적인 권위자로서의 교황을 불신하였다.
바티칸에서는 엄격한 교황지상주의 지지자들인「열성분자들」과 보다 현실주의적인「정략가들」이 서로 대항하였다. 이러한 싸움은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극에 달했다. 논쟁은 주교들이 로마에 아직 모이기 전에 예수회에서 발간하는「라 치빌따까똘리까(La Civilta Ca-ttolica, 가톨릭 문명)」이라는 잡지의 한 기사로부터 시작하였다. 사실 비오 9세 교황은 이미 성모님이 원죄없이 잉태하셨다는 교리를 아무 문제없이 선포하였다.
독일, 오스트리아, 네델란드, 미국 등지에서 이 교리를 거부하는 약간의 사람들이「구(舊) 가톨릭 교도」라는 분열의 기원을 제공하였지만 더이상 확대되지는 않았다. 결국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지권의 재확인을 전폭적으로 환영하였다. 그리고 갈리아주의는 더이상 확대되지 못했다.
사실 교황의 무류지권의 선포는 성전(聖傳)에 반하는 새로운 교리가 아니라, 예전의 다른 공의회 결의처럼 교회 안에서 항상 존중되었던 믿음과 실천되어온 내용들을 장엄하게 확인하는 것 뿐이었다. 다른 한편 이 무류지권은 제1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성모승천 교리를 정의할 때 단 한 번 사용되었다.
교황지상주의가 교황의 기능과 권위, 그리고 주교들의 기능과 권위라는 상관된 두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교황의 무류지권이 선포된 다음날 일어난 1870년의 전쟁은 상기의 두 번째 문제를 다루려 했던 일정을 중단케 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교회에 관한 교의회에서 전쟁 때문에 다루지 못한 주교직에 관하여 깊이 다루었다.
이 헌장 27항은 주교들은 자기 교구에서 단순히 교황의 대리로서가 아니라「자기의 고유한 권위」를 행사하는데, 지역교회에서『소속 신도들에 대하여 법을 세우고 판단하고 예배와 사도직에 관한 모든 사항을 조정할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수행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주교의 권한의 행사는 교회 최고 권위에 속하고, 이 책임은 베드로의 후계자이며 로마 사도좌의 으뜸과 일치하여 보편교회 안에서 합의하에 행사한다.
교황지상주의는 보편교회를 와해시키고 교황권을 축소하여 국가교회를 세우려는 위험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문제에 대한 극단적인 처방은 대개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였다는 사실을 역사는 증언하고 있다.
지역교회는 세계교회의 부분교회이지 독립적인 개체교회가 아니다. 개인의 개성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인간 본성이라는 보편성과 동떨어진 개성은 존중 받지 못하듯이, 지역교회가 보편교회와 동떨어진 꼴을 갖추려고 고집할 때 결국 가톨릭의 보편성을 잃게 된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