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아침이 밝았다. 다사다난(多事多難)이란 말로 묶어 버리기엔 웬지 아쉬움이 앙금처럼 남는다. 그런대로 또 한 해를 마감했다는 자위로 넘겨야 할 것 같다.
늘 그렇듯 새로운 한 해를 여는 문턱에서 우리의 소망은 무얼까, 무엇이어야 할까를 생각해 본다. 아마도 「평화」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가정의 평화, 이 땅의 평화, 세계의 평화…. 참된 평화야말로 온 인류의 절박한 소망일 수 밖에 없으리라.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대마리, 민통선(민간인 통제구역)안 부락. 대한민국의 최북방에 위치한 이곳 주민들의 새해맞이 소망에도 평화ㆍ통일은 그렇게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제야의 종소리」를 며칠 앞두고 찾아간 대마리의 여느 농촌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은 짐짓 초행길인 기자의 설레임을 무색케 만들었다. 가는 길에 간간이 눈에 띄었던 군사시설들을 제외하고는 추수가 끝난 썰렁한 논이며, 집집마다 서 있는 경운기 트렉터 등에서 무슨 신기함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중무장을 했는데도 가슴까지 파고드는 매운 겨울 바람만 최전방에 와 있음을 실감케 했다.
군종교구 열쇠성당 심한구 신부님의 세심한 배려와 안내, 그리고 인근 관할 부대장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마을에 도착하자 공소신자 김윤식(프란치스꼬) 씨가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얼른 알아보고는 악수를 청한다. 공소에는 김인기(다미아노ㆍ58) 회장을 비롯해 신자 몇몇이 나와 차가운 몸을 녹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대마리가 어떤 곳일까 무척 궁금했습니다만…』
『다들 그래요. 하지만 보시다시피 다른 농촌이랑 별로 다를게 없지요』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다는냥 김 회장은 얼른 대답했다.
대마리에 처음 마을이 형성된 것은 지난 68년. 당시 정부는 6ㆍ25후 생계가 어려웠던 인근 주민들의 생활고를 해결해주기 위해 민통선 북방에 자리잡은 이곳으로 집단이주를 계획했다.
68년 8월 30일 경기도 연천에서 68가구, 강원도 철원에서 82가구 등 모두 1백50가구가 대마리로 이주해 자리를 잡았고, 이들 가운데는 신자가정 6세대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에게 공통된 것은 모두가 현역 군복무를 끝낸 제대군인들이라는 것. 이북과 가장 근접한 지역이라는 점을 감안, 만약의 사태를 염려해 정부가 취한 최소한의 조치였다.
그러나 이들이 삶의 터전으로 잡은 곳은 허허벌판 황무지에 불과했다. 한마디로 사람살 곳이 못되었다.
이때부터 천막을 치고 함께 기숙하며 이 버려진 땅을 개간하는 고된 생활이 시작됐다. 가진 것이라곤 아직은 젊은 몸뚱아리 하나뿐이었다.
열심히 일했지만 2년간 소출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지뢰를 밟거나 불발됐던 포탄을 건드려 목숨을 않거나 두 다리를 잃는 경우도 허다했다. 20여 명이 그렇게 죽거나 불구가 됐다.
이러한 가운데 69년 가을 공소가 생겼고 신자들은 신앙에 매달리며 이 긴박한 상황을 헤쳐나갔다. 민통선까지 40여 리, 다시 청원본당까지 10여 리, 그 먼길을 이들은 걸어서 찾아갔다. 마을 사람들을 모아 예비자 교리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자 처음 6세대이던 신자가정이 20여 세대로 불어났고 신자 수도 60여 명으로 늘어났다. 넉넉지 못한 살림이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더욱 한가족처럼 지낼 수 있었다.
북한 땅을 지척에 두고 있으면서도 가불 수 없는 곳. 그래서 이 땅의 어느 누구보다 분단의 아픔과 망향의 한을 절감하며 살아가는 이곳 사람들은 그만큼 통일과 평화를 갈구하는 마음 역시 깊기만 하다.
공소사람들과 마을 구성원들이 6ㆍ25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온 몸으로 체험한 격전의 용사들이고, 당시의 포성은 멎었지만 아직도 민족의 가장 큰 아픔인 분단의 상처를 끌어안고 있다는 공통된 과거가 이들을 그렇게 하나로 묶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마리 마을 어귀에 들어서면 그 유명한 백마고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6ㆍ25전란중 최대 격전으로 꼽히는 백마고지 전투가 바로 여기서 있었다는 사실은 이곳 사람들의 대공의식을 가늠케 하는 또 하나의 기준이 된다.
52년 10월6일부터 15일까지 10일 주야동안 12차례나 뺏고 빼앗기는 공방전 중에 피아군 합해 사상자 2만여 명, 사용한 포탄 27만5천발. 포격으로 인해 온 산이 무릎까지 빠지는 모래밭으로 변해버렸으며 전투에서 패한후 김일성이 3일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애통해했다는 곳.
백마고지.
철원-평강-금화를 잇는 중부전선 일대의 적 병참선을 차단, 확보해야 한다는 전략적 중요성 외에도 양 국군의 명예를 건일전으로 비화했던 백마고지 전투는 결국 아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지만 당시의 처절했던 전쟁상은 바로 우리의 과거로 대마리 사람들의 가슴속에 조각되어 있다.
52년 10월19일자 조선일보는 당시 백마고지 전투의 비참함을 이렇게 표현했다.
『28만발의 포탄의 작열로 피아 1만5천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10일간의 싸움끝에 24번만에야 우리 손에 들어온 격전의 고지 백마산은 지금 싸움이 끝난후 깊은 침묵속에 잠겨있다… 전 장병의 얼굴은 격전끝의 극도의 피로에 납처럼 무겁다.
「얼마나 고되십니까」하고 위로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다가는 적포에 무참히도 쓰러진 전우의 후송되어 가는 시체를 바라보고는 간다. …송판에다 칡넝쿨로 전우의 시체를 묶어가지고 내려가는 사병들의 새로운 군복에 벌써 전우의 피가 맺혔다. 백마산 이 봉우리 저 봉우리에 까마귀떼가 울부짖으며 돌아간다』
또 AP통신은 10월9일발로 이렇게 타전했다.
『한국군과 중공군은 일진 일퇴를 거듭하는 백마를 탈취하기 위해 피비린내나는 전투를 전개했다.… 한국군은 적의 침략요지를 장악하기 위하여 6일이래 20회나 주인을 바꾸어가면서 혈투를 벌였다』
그래서일까 대마리 주민들의 마음속엔 『반공의식에 관해서는 한국제일』이라는 자부심이 늘 자리하고 있다. 이들에게 『세계정세라든가 남북관계도 많이 달라졌지 않느냐』는둥 『반공이 아니라 승공이 돼야 하지 않겠느냐』는 식의 얘기는 별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특히 근자에 와서 활발히 일고 있는 통일논의는 오히려 이들의 마음을 더 견디기 어렵게 만든다. 꿈에도 못 잊을 형제와 고향땅을 다시 밟는다는 것은 실향민 세대가 많은 이곳 주민들에게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찬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지나온 세월동안 무수히 속고 속아서 이젠 체념한지 오래다. 「우리의 소원」이 이들의 가슴속에 응어리져 남아 있을테지만 정작 통일에 대해선 『되어봐야 알지』라는 말뿐이다.
『북한체제의 변화없이는 통일은 불가능하다』는 이들의 말에서 지나치게 비관적이라는 생각과 함께 어쩌면 누구보다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하고 있을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속내야 어떻든 전형적인 한국 농촌의 모습 그대로인 대마리는 우리 농촌의 문제를 고스란히 안고 있었다.
현재 188가구에 1천여 명의 대마리 주민들은 1백% 논농사에 의존하고 있다. 타지에 비해 제법 큰 규모로 농사를 짓는데다 기계화가 잘 되어있어 외관상 보기에는 부농(富農)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다 「속빈 강정」이라는 것이 주민들의 하소연이다.
몇천만원짜리 농기계 한 대 갖고 있어봐야 그게 다 빚일 따름이고 가구당 50가마로 한정된 정부의 추곡 수매량은 한숨만 나오게 할뿐이다. 이자라도 빨리 갚으려고 울며 겨자먹기로 수매가 보다 훨씬 낮은 가격으로 내다 팔아야 되니 악순환은 되풀이된다.
자식들은 커서 대부분 인근 도회지로 떠나 일손부족은 만성적인 중병이 되었다. 한때 2백명이 넘던 마을내 묘장국민학교생이 요즘은 50여 명 수준을 맴돌고 있다.
게다가 주인없는 땅이라던 곳에 언제부턴가 지주라는 자들이 나타나 소유권을 주장했다.
『어떻게 일구어 놓은 땅인데』하며 배신감에 치를 떨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또 웬 기업가가 금강산에 갔다 오더니 부동산투기 바람이 민통선 안에까지 불어닥쳐 땅 값을 5~6배나 끌어올려놨다.
지난 1년은 내내 UR 때문에 맘 편할 날이 없었다. 『쌀마저 개방되면 우린 설 곳이 없습니다』이들의 절박한 심정은 대다수 한국 농민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정착 당시 어려웠을 때나 이후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던 때에 매우 활발했던 공소도 주민들이 생활에 허덕이게 되자 위축되더니 냉담자도 생기기 시작했다.
칠원본당 송병철 신부와 본당 수녀가 바쁜 본당사목 중에도 늘 이들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찾아보지만 공소에 신자 재교육이나 교리 등을 맡아서 할 이가 없어 힘에 부치는 실정이다.
『도시와 농촌교회간 교류 등 논의가 활발한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이곳은 지역적으로도 힘들고 따라서 저희들 스스로가 공소를 지키고 키워가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계오년 새해 소망이요? 농촌 현실에 국민이 진정으로 관심을 가져주십사 하는 거지요. 이 사회의 평화도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할 수 있는것 아니겠어요』
멀고 낯설게만 느껴지던 대마리. 그러나 이들의 진솔한 삶의 모습들을 접하고 돌아오는 길에 벌써 대마리는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가까운 이웃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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