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지난 9월12일부터 10월18일까지 한 달여에 걸쳐 독일을 방문하였다. 필자는 이미 1969년부터 1975년까지 독일에서 수학기간을 보낸 바 있고 1982년과 1989년에도 각각 일년 또는 한 달 남짓 체류한 바 있기 때문에, 이번으로 통산 네번째에 걸쳐 이 나라를 방문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번 방문은 계기와 일정 등 여러 면에서 이전까지의 방문과는 구별된다. 이번에는 개인적 필요성에 의해 독일을 방문했던 이전과는 달리 독일 가톨릭 전교회「미시오」(Missio)의 초청에 의해 방문이 이루어졌으며, 특히 과거에는 불가능했던 구 동독 지역 소재 교구 방문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통일 이후의 변화된 독일사회와 교회 현실에 접하면서 통일을 갈망하는 우리사회나 교회와의 상관관계를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방문일정과 연관시켜 독일을 보고 느끼게 된 점들을 간략히 토론하고자 한다.
1, 독일방문 일정
올해에 독일 교회는 9월16일부터 10월13일에 걸쳐「하나의 다른 세계를 위한 도움」(Hilfe fur eine andere Welt)이라는 표제어를 내걸고 진행되는 세계 선교주일 준비행사에 아시아의 한국, 인도와 인도네시아, 그리고 아프리카의 케냐, 우간다, 자이레, 카메룬과 부룬디 등 8개국 교회로부터 주교 4인, 수도원장 1인, 몬시뇰 1인과 신학자 신부 2인 등 모두 8명을 초청하였다. 방문객들은 독일 교회들을 방문하고 신자들과 접촉하면서 선교에 대한 관심을 제고시키고 선교지원 활동에 지속적으로 동참케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일종의 순회대사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초청된 것이다.
공식 일정은「미시오」본부가 위치하는 아헨(Aachen)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는「헤르조겐라트」(Herzogenrath)의 한 연수회관에서 9월16일 오후부터 18일 오전까지 여덟명의 방문객과 주최측 인사들과의 연석회합으로 시작되었다. 이어서 초청객들은 각기 2개 교구를 방문하도록 배정되었다. 필자는 9월18일부터 10월1일까지는 구 동독 지역에 소재하는 주민대비 신자율 5%의 막데부르그(Magdeburg) 교구를 방문하였다.
10월2일부터 11일까지 방문하게 된 서독 트리어(Trier)교구는 그리스도교에 신앙의 자유를 허용한 콘스탄틴 황제의 모친 헬레나 성녀에게로 소급되는 독일에서 유서깊고 신자 거의 2백만을 포용하는 비교적 카다란 교구였다.
이러한 방문 일정 중에는 교회 내지 일반 언론기관과의 인터뷰들이 포함되는데, 필자의 경우에는 트리어 교구가 속한 자알란드(Saarland) 주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사 측으로부터 인터뷰와 동정촬영 요청에 갑작스레 응하는 일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인터뷰는 대체적으로 독일 방문의 목적과 아울러 한국과 한국교회의 사정을 알리는 내용과 독일을 방문하면서 받는 인상에 관한 소감을 피력하는 내용과 관련하여 이루어졌다.
트리어 교구에서의 방문일정이 끝나고 나서 10월12일 시작회의의 개최장소 헤르조겐라트로 되돌아가 여덟명의 방문객들과 주최국측 인사들이 함께 모여 마지막 평가회의를 갖게 되었다. 이 회합에서 방문객들은 금년 세계 선교주일의 기본주제에 대한 신자들의 반응 주로 접촉한 계층, 참여자들의 관심도, 중요하게 여기는 결과 제기된 질문들의 성격, 언론사와의 인터뷰 진행경위, 주최측의 초청행사 준비에 대한 평가, 조직과 숙소 등과 관련한 결함 유무 등에 대한 소견을 개진하고 다른 의견도 아울러 피력할 기회가 두 번씩 주어졌다. 마지막 날인 10월 13일에「미시오」본부 회의실로 장소를 옮겨 회장을 위시한 간부들이 참여한 자리에서 여덟 방문객들이 각기 소견을 피력하는 시간을 가지며 한 달 가까이 계속된 일정을 모두 끝맺게 되었다.
2. 독일 가톨릭교회의 위기상황과 자구노력
1989년에 이어 3년 만에 다시 독일을 방문하면서 느끼게 된 독일 교회의 난국의 실상과 자구노력의 면면을 단편적으로나마 소개하고자 한다.
세계 선교주일 준비행사 개막 연석회의에서 행한「미시오」회장 카우트(B. Kaut) 몬시뇰의 기조강연은 독일 교회가 처한 난국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독일 교회의 자구노력을 파악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그는 먼저 금년도 세계 선교주일의 기본취지를 간략히 설명하고 이어서 독일 사회 일각에서 일고있는 외국인 배척 움직임에 대한 교회의 태도표명에 대해 언급한 뒤에 독일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일종의 위기상황에 관해서 비교적 소상하게 언급하였다. 그는 성직자 독신제나 주교 임명,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위치, 또는 인공피임 문제들과 같은 교회구조와 사회현실에 대한 교회의 기존 노선에 비판적인 인사들에 대한 교회 당국의 강경한 제재조치에 대한 사회여론의 반응이 통일 이후에 특히 현저하게 부정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특히 교회의 권위주의에 대한 반감이 전 교회뿐만 아니라 독일 사회 전체에까지 확산되다시피 하였다고 분석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주일미사 참여를 비롯한 교회행사로부터 등을 돌리거나 아예 교회를 공식적으로 이탈하는 신자들이 끊이지 않으며, 이들 중에는 열성적으로 교회활동에 투신했던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음도 아울러 강조하였다. 그는 또한 80년대에 들어와 어느 정도 안정세를 유지하던 성직자 지망자 수효가 통일 이후에 오히려 현저하게 감소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독일 교회에서 많은 신자들이 공식적으로 교회를 이탈하고 수도나 성직 지망자가 감소되었다는 사실은 필자가 공식적으로 방문했던 트리어 교구의 슈바르츠(H·Schwarz)보좌주교와 공식일정이 끝난 뒤에 방문했던 지난날의 튜빙겐은사이자 1989년 이래 롯텐부르그-슈트트가르트(Rottenburg-Stuttgart)교구장인 카스퍼(W·Kasper)주교에게서 공통적으로 시인되고 있었다. 트리어 교구는 2백만의 신자 규모에 비추어 신학교에 매 해 30여 명이 들어와야 하는데 올해에는 불과 3명만이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신자수 2백20만을 포용하는 롯텐부르그-슈트트가르트 교구에는 올해에 8명밖에 신학교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많은 신자들의 교회 이탈과 성소자 감소는 실로 독일 교회의 지도층들을 힘들게 만들고, 이 교회의 장래에 대해 비관을 느끼게 하는 요인들임이 분명하다.
카우트 몬시뇰에 따르면 이러한 사실과 다른 여러 현상에 비추어 볼 때에 독일 교회 자신이「하나의 새로운 선교교회」가 되었다. 그래서 이제 독일 교회는 고전적 의미의 선교교회들에게 베풀어주고 지도하기만 하는 교회가 아니라, 역으로 이 교회들로부터 배우고 받아들여야 하는 처지의 교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독일 교회가 현금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젊은 교회들의 협력을 절실하게 필요로 한다고 말하면서 참석한 초청객들에게 조언을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로써 그는 독일 교회와 여타 선교지역 교회와의 관계가 오늘날까지 형성되어 있는「대부모-대자녀 관계(Patenschaft)를 조속히 지양하고 양 편이 상부상조하는「동반자 관계(Partnerschaft)로 정립되어야함을 분명히 천명한 것이다.
카우트 몬시뇰의 이러한 자세는 필자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독일 교회의 상황분석과 대안제시와 관련하여 독일 신학자들 사이에서는 논의가 이루어진지 이미 오래고 그의 발언이 내용적으로 새로운 것은 아니나 현실적으로 작고 가난한 수많은 선교교회들에게 천문학적 숫자의 재정지원을 하는 기관의 책임자에게서 이러한 내용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 별다른 느낌이 든 것 역시 사실이다.
그가 현금의 시대의 징표를 정확히 인지하면서 소위 제3세계 교회에 대한 강력한 지원활동을 수십년간 전개하는 동안 부지불식간에 깊이 형성된 독일교회의「대부모」지위를 포기하고「동반자」자리를 당연하게 받아드리고 작고 가난한 교회로부터 배우고 받아드리려는 엄청난 태도변화를 공공연하게 드러낸 것이다. 선교교회로부터 배우고 받아들이려는 겸허한 자세는 뒤이어 행해진 금년의 세계 선교주일의 취지에 대한 해설 강의를 비롯한「미시오」간부들의 발언에서 일관되게 천명되고 있으며, 그들의 거동에서도 어느 정도 감지되고 있었다.
이러한「미시오」간부들의 자세가 의례적인 인사에 그치지 않고 진심에서 나오고 있음은 이미 수삼년전부터 인도의 한 신학자(필자와 함께 70년대 초에 류빙겐에서 수학했던 예수회 사제)를 매년 초청하여 교회기관 종사자들과 봉사자들을 상대로 6주에 걸쳐 인도 영성에 관한 연수 강의를 실시케 하고 있는 사실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필자도 이미 1987년에 한국을 방문했던 한「미시오」직원에게서 한 학기 또는 일년동안「토착화」와 관련한 강좌를 맡을 수 있는지 여부를 질문받은 일이 있었다. 필자가 한 두 시간이면 몰라도 한 학기 이상 토착화 강의를 하는 것이 역부족이어서 사양할 수 밖에 없었는데 비해서, 인도의 동료 신학자는 이러한 제의를 무난히 받아들인 셈이다. 필자는 다시 한번 한국의 토착화된 신앙의 진수를 정기적으로 소개해달라는 진지한 청을 받고 이번에도 어쩔수 없이 묵묵부답으로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국교회의「토착화」에 대한 독일교회 인사들의 관심은 매우 컸다. 그들은 서구 교회가 처한 난국을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 지원을 유구한 종교문화 전통을 지닌 아시아 문화를 수용하여 형성된 새로운 그리스도적 영성과 사상으로부터 받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 같다. 그래서「미시오」간부들이나 카스퍼 주교와 같은 분들이 토착화를 주로 연구하게 될「한국 그리도 사상 연구소」에 지원의사를 혼쾌히 밝힌 것이다.
이번 방문을 통해서 독일 교회안에 이전과는 다른 분위기가 감지되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예컨대 미사나 기타 공식 교회행사에서 의식을 집전하는 성직자들이 신자들을 상대로 하는 인사가 3년전까지만 해도 어디를 가나「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Liebe Bruder und Schwestern!)의 형식을 취했는데 비해서 이번에는 순서가 바뀌어「친애하는 자매와 형제 여러분」(Liebe Schwestern und Bruder!)의 형식으로 동독이나 서독지역에서 공동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리고「미시오」나 막데부르그 교구의 고위층 지도자들에게서는 권위주의의 모습이 전혀 느껴지지 않음도 인상적이었다. 특히 이 교구의 노박(Lo Nowak) 주교의 소탈한 자세는 가히 경탄을 자아낼만 하였다. 모두 13명의 인사들이 참석한 교구 확대 간부회의에서 여성간부를 포함한 5명의 평신도들도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고 불만사항을 기탄없이 토로하는 것도 인상깊었지만, 이들이 보고있는 중에 회합에 참석한 사제들이 주로 사석에서 가까운 사람끼리 사용하는 호칭「Du」(=상대방에 대한 우리 말의 반말호칭에 가까움)를 서로 사용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주교에게도 공식적인 호칭「Sie」(=상대방에 대한 귀하와 같은 존칭)대신「Du」호칭을 거침없이 사용한 사실은 거의 충격적이기까지 하였다. 과거에 서독에서 일반 사제들이 주교에게 공석에서「Sie」아닌「Du」호칭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 놀라운 일은 노박 주교 자신이 이를 전혀 개의치 않았다는 사실이다.
독일 교회 일각에서 고위 성직자들을 포함하여 신분과 지위, 그리고 성의 차이를 초월하여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한 형제 자매적 관계를 맺고 생활하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을 보고 이 교회의 장래가 결코 어둡지만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3, 독일의 통일이 주는 교훈
독일은 세계 제2차 대전 발발의 책임을 지고 전승국들에 의해 국토가 분단되었으나 유혈사태 없이 서독에 의한 동독의 합병 형식으로 통일을 1990년 10월2일 공식적으로 이룩할 수 있었다. 전 세계인의 경탄과 우리 한국인의 부러움을 받으며 이룩된 독일의 통일은 동독 복구를 위한 막대한 경제부담과 네오-나치의 등장으로 독일의 사회불안과 세계의 우려를 자아내게 하고 있다.
9월18일 저녁 무렵 지방 도로를 통해 동독지역으로 들어갈 때의 착잡한 감회는 오래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통일이 이루어진지 3년째에 접어 들면서도 19세기에 건립되었음직한 좁은 도로를 따라 인적드문 거리 양편에 폐가처럼 느껴지는 누추한 건물들이 상당수 시야에 들어오면서 개인의 존엄성이 무시된 사회의 황폐성을 느끼며, 북한의 시골 모습이 어떠할지를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동서적 간에 보이는 장벽은 허물어졌으나 보이지 않는 장벽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말에서 느껴지듯이 양편 주민들이 마음으로 화합을 아직 완전히 이루지 못하고 있다. 독일에서는 통일이 이루어지기 훨씬 전부터 우편과 통신교환은 물론이고 친지 방문과 문화 및 학술 교류 등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통일이 되고난 뒤에 독일인들은 의식과 생활양식의 차이로 말미암아 심한 갈등을 겪고 있다.
특히 동독과 서독의 제조업체의 수준차이가 현격한 때문에, 상당수의 동독 업체들이 조업정지되거나 감축조업됨으로 해서 많은 실업자들이 생겨나게 되었으며, 취업 중인 근로자들이라도 서독의 같은 직종 종사자의 급여에 60%에 해당되는 급여를 받아야만 하는 현실 속에서 동독 주민들은「이등 국민」이라는 열등의식을 지니기에 이른 것이다. 밖으로 드러내기 힘든 불만이 통일 후에 밀려든 외국인 망명희망자들에 대한 반감으로 폭발하여 급기야 독일 사회 전체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현재로서는 동서독 교회가 이러한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지 않고 있으며, 묘책을 가지고 있지도 않는 것 같다. 오히려 동독 교회의 경우 통일 이전에 동독정권 하에서 어느 정도 단합된 신앙생활을 하면 신자들이 실업문제로 일치를 잃어가고 있으며 청소년들이 자본주의 세속문화에의 탐닉으로 말미암아 신앙생활을 등한히 하게 되어 새로운 어려움에 봉착한 인상을 주고 있다.
조국 통일은 우리 국민 모두의 염원이다. 그러나 우리는 독일의 경우처럼 통일의 사전단계를 전혀 밟지 못하였다. 사전 단계를 오래 그리고 광범하게 밟은 독일이 통일의 후유증을 심하게 앓고 있는 현실을 지켜 보면서 우리는 현명하고 치밀하게 통일을 대비하는 노력을 범국민적으로 그리고 범교회적으로 기울여야 하겠다는 생각이 독일을 떠날 때까지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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