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근 시인은 강희근 시인은 196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문단에 발을 내디뎠다. 펜 문학상, 김삿갓 문학상, 산청함양 인권문학상 등 여러 상을 받았으며, 국립경상대학교 교수와 인문대학장을 역임했다. 「한국가톨릭시연구」, 「우리시문학연구」 등의 저서와 「풍경보」, 「프란치스코의 아침」 등 시집을 다양하게 펴냈다. 현재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문학표절문제연구소 소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
눈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주님과 일치하며 기도에 기도를 거듭했던 시간들이 한 순간에 머릿속을 스쳐갔다. 온전히 주님께 맡겨드렸던 시극, 그 작품이 한국가톨릭문학상 특별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는 소식에 강희근(요셉·74) 시인은 밀려드는 감동을 감출 수 없었다고 말한다.
강 시인은 1965년 등단해 50년 이상 끊임없이 시를 쓰고, 대학 강단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며 살아왔다. 하지만 시극(詩劇)은 처음 썼다. 원숙한 작가로서도 떨리는 도전이었다. “작품을 공적으로 표명하고” 쓴 것도 처음이었다.
“시극은 제 능력 밖의 창작이라고 생각해 잠시 망설였지만, 그 마음 또한 봉헌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생각이 기우(杞憂)에 불과했다는 것은 금방 드러났다. 그는 “천주가사 연구가인 하성래 교수가 「사헌유집」에서 발견한 내용에 유관 자료를 보태 쓴 ‘거제로 유배된 유항검의 딸 섬이의 삶’을 읽고는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아홉살 어린 여자아이가 유배지에서 홀로 외롭게 지내면서 가장 먼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내가 여기 왜 와 있는가?’라는 생각을 떠올리지 않았을까요? 무엇보다 동정을 지키려고 동굴 속 같은 흙돌집에 들어가게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강 시인은 거제도에서 보낸 유섬이 삶의 시작과 끝은 오로지 가족들과 함께 지낼 때 얻은 신앙의 힘으로 매듭지어진다고 확신했다. 또 유섬이가 선종한 나이는 71세. 시인도 70대이기에, 유섬이가 겪은 생의 고비 고비를 더욱 깊이 공감하면서 유추해볼 수 있었다고 말한다. 강 시인은 이 시극의 핵심은 천주교 자료를 찾기 위해 유섬이가 홀로 지내던 흙돌집을 깨라는 부사의 명령을, 온 마을 사람들이 나서서 막아낸 장면이라고 소개한다. “민초, 민중들의 힘이 그 때도 지금도 신앙을 탄탄이 지탱해준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특히 강 시인은 작품을 쓰기 전에 “왜 이 시대에 순교자 가족의 이야기가 필요할까”를 오랫동안 고민했다고. “순교자의 가족들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 절망, 치욕, 아픔 등을 이겨내며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순교자의 가족들은 누구일까요? 공동체 안에서 소리 없이 선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누구인지 찾아보는 것이 이 시대의 ‘유섬이’를 찾는 게 아닐까요.”
수십 년을 거듭해온 창작의 시간 동안, 강 시인은 사물과 세상을 ‘새롭게 보고 해석하려는 노력을 내려놓은 적이 없다. 그 노력에 더해 강 시인은 “이렇게 유섬이를 만난 것이, 자신이 시인이고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은총이지를 새삼 절감했다”고 고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