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앵베르 라우렌시오 성인은 제2대 조선대목구장으로서, 최초로 우리나라에 입국한 주교다.
성인의 한국 이름은 범세형(范世亨)으로, 103위 한국성인호칭기도에서 ‘범 라우렌시오’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성인이다.
성인은 1796년 프랑스 남부의 가난한 집안에 태어났다. 그는 총명할 뿐 아니라 기도나 공부에도 열심이었다. 어릴 적 스스로 묵주 만드는 법을 깨친 성인은 묵주를 만들며 공부하고 가계에도 보탬을 주곤 했다.
성인이 선교를 꿈꾼 것은 엑스교구의 대신학교를 다니면서부터다.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로 적을 옮긴 성인은 1819년 사제품을 받고 곧 중국 쓰촨(四川)으로 파견됐다. 성인은 12년 이상 중국에 머물면서 중국의 언어와 풍습을 익히고 선교에 전념했다.
1836년에는 제1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의 보좌주교로 임명돼 조선 땅으로 향했다. 하지만 이듬해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을 향하는 길에 선종하자, 성인은 제2대 조선대목구장이 됐다. 성인은 마침내 1837년 12월 조신철, 정하상 등의 협력을 받아 조선에 들어왔다.
성인은 3개월만에 고해성사를 줄 수 있을 정도로 우리말을 익혔다. 또 우리말 기도서가 없음을 안 성인은 교회의 다양한 기도문을 우리말로 번역해 「천주성교공과」, 「천주성교십이단」등의 기도서를 편찬하기도 했다. 이렇게 한글기도서를 보급하자 보다 많은 신자들이 쉽게 기도생활을 할 수 있게 됐다. 특히 「천주성교공과」는 1972년 가톨릭기도서가 나올 때까지 한국교회의 공식 기도서로 사용됐다.
성인은 허약하고 병든 몸이었지만, 한시도 쉬지 않고 바쁘게 선교사업을 펼쳤고, 그것을 최대의 행복으로 삼았다. 성인은 이미 조선에 입국해있던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와 함께 지방을 순회하기도 하고, 죽을 위험에 처한 외교인 어린이에게 세례를 주는 등 다양한 선교활동을 펼쳤다. 밤낮을 가리지 않은 성인의 선교로 박해 속에 침체되던 신자들이 힘을 얻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자 성인은 오히려 더 많은 신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성사를 집전했다. 이렇게 성무에 힘쓰는 동안 배교자들의 밀고와 관헌의 움직임도 활발해졌다. 위태로워진 상황을 알고 있던 성인은 같은 파리외방선교회의 선교사들과 함께 자수했다. 자신들의 자수를 통해 다른 신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1839년 9월 21일, 그는 43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 성인 발자취 만날 수 있는 곳 - 요당리성지·왕림성당
요당리성지.
왕림성당.
요당리성지(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요당길 155)는 성인이 선교를 위해 순방하던 양간공소가 있던 곳이다. 성인은 기해박해 전 양간에 교회 전답을 마련해 관리하게 했고, 박해의 징후를 알고 양간 지역에 피신하기도 했다.
평택대리구 왕림성당(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왕림1길 71)은 성인이 방문해 성사를 집전하던 갓등이공소에서 이어오는 성당이다.
※문의 031-353-9725 요당리성지, 031-227-6678 왕림성당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