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초기의 교회사에 관해 먼저 대외적인 견지에서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를 2회에 걸쳐 고찰했다. 그런데 대외적인 견지에서 고찰해야할 문제가 또하나 있으니 다름아닌 이 시기에 복음이 확대 전파된 이야기이다.
민족 대이동 이후 새 민족들에게 교회가 어떻게 복음을 전하고 또 어떤 민족들이 5세기 말에서 7세기 말까지 그리스도교화되였는지를 보았다. 그 결과 애란, 앵글로 색슨족, 프랑크족 등이 개종하고 이어 애란과 영국의 수도자들이 대륙으로 건너와 프랑크 선교사들과 함께 화란과 게르마니아 등지에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그 성과는 아직 피상적이었고, 8세기 보니파시오의 조직적인 선교활동을 통해 비로소 그 성공이 보장되기에 이른다. 이어 서기 1000년을 전후해서는 북구, 중구, 동구의 남은 민족들이 개종함으로써 거의 전 서양이 그리스도교화 된다.
■ 독일의 사도 보니파시오
빈프리트 보니파시오는 675년경 남부 영국 웨섹스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들어가 매우 착실한 교육을 받았다 40대가 되었을 때 그는 숙원이던 대륙 선교에 나섰다. 그러나 실패하고 돌아왔다. 그러자 그는 다른 방법을 택했다. 그것은 우선 로마로 순례하여 교황으로부터 파견되고 축복받는 일이었다.
그래서 빈프리트는 719년 로마로 순례하고 교황을 방문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2세는 그에게 프리지아와 작선에 복음을 전하도록 전권을 부여했다. 동시에 그에게 보니파시오란 로마 순교자의 이름을 주었다. 이리하여 독일 제일의 사도가 탄생했다.
3년후 보니파시오는 다시 로마를 방문했다. 이때 교황은 그를 주교로 성성했고, 보니파시오는 교황에게 충성할 것을 특별히 서약했다. 또 교황은 그에게 카알 마르텔 앞으로 보내는 추천서를 주어 보냈다.
보니파시오는 737년 세번째로 로마를 방문했다. 이때 교황으로부터 전 게르마니아의 교황 특사로 임명되였다. 이것은 그의 새로운 활동의 전기가 되었다. 즉 이제 그는 계획대로 교회 개혁과 교회조직을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여러번 프랑크 주교들을 교회회의로 소집하고 거기서 그의 개혁안을 채택하고 추진시켰다. 그는 무엇보다도 베네딕도 수도회칙의 채택과 교황에 대한 충성을 의무화했다. 그의 개혁으로 몰락했던 프랑크 교회가 부흥되고 새 활력을 띄게되었다. 그때까지 사유교회에 불과했던 프랑크 교회들이 로마 교회와 긴밀하게 결합되었다. 이러한 의식의 큰 변화는 마침내 교황과 프랑크 왕국이 동맹을 체결하는 역사적인 사건을 낳게했다.
그러나 정작 그 동맹이 성립되던 754년 보니파시오는 이미 소외된 몸이었다. 그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고 프리지아에 다시 전도할 마음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해 그곳으로 다시 전도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52명의 동료들과 더불어 외교인들에 의해 타살되어 순교했다. 유해는 그의 유언대로 그가 세운 풀다 수도원으로 옮겨졌다.
보니파시오는 오로지 평화적인 선교를 추진했다. 그러나 프랑크 왕국에서는 총검을 앞세운 폭력 포교가 자행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카알 대제는 작슨인들에게 개종을 강요하기 위해 30년 동안이나 전쟁을 하며 기천명의 주민을 학살하는 등 너무나 잔인한 수단으로 임했었다.
■ 북부ㆍ중구ㆍ동구의 그리스도교화
이들 지역의 주민들은 항가리 같은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게르만족이거나 슬라브족이었다. 이들에게 복음을 전한 선교사들은 이미 애란이나 영국의 수도자들이 아니었고 로마교회나 비잔틴 교회에서 파견된 선교사들이었다. 동서교회의 대립은 여기서도 나타났으니 예컨대 불가리아에서는 그 교회를 장악하기 위해 로마 교회와 비잔틴 교회가 서로 경쟁을 하기도 했다.
북구의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있는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의 본연의 사도는 후에 독일 함부르크의 대주교가 된 성 안스카리오(+864)이다. 그는 갈리아의 수도자로서 9세기에 이 지방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완전히 그리스도교화 되는 것은 11세기 전반기이다. 특히 신자 왕중에서 가장 유명한 성 카누토 왕(1018-1035) 때 교회가 크게 번창했다. 미구에 이웃 아이슬란드와 그린랜드에도 복음이 전해졌다.
중구의 폴란드, 보헤미아, 헝가리중에서 폴란드는 보헤미아에서 피신한 비잔틴 수도자들에 의해 처음으로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다. 그러나 전체가 개종하는 것은 그 지방의 영주 메치슬라오(962-992)의 공적이었다. 그는 보헤미아의 가톨릭 공주와 결혼한 후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5년 내에 전지방이 그리스도교화되면서 11세기에 크게 번창했다.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오늘의 체코슬로바키아)는 동방의 치릴로(+869)와 메토디오(+885) 형제 수도자에 의해 860부터 복음이 전해졌다. 그들은 슬라브어로 성경을 번역하고 또 슬라브어 전례를 도입함으로써 주민들의 신임을 얻었으나 그 때문에 투옥되기도 했다.
그들은 비잔틴 선교사였으나 로마 교회와 더 결합되어 있었다. 치릴로는 로마로 와서 수도원에서 사망했고, 메토디오는 로마에서 주교가 된 후 다시 돌아가 활동을 계속했다.
오토에게 정복된 후 헝가리에 정착한 훈족에게는 보헤미아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복음을 전했다. 이어 성스테파노가 1001년 왕위에 오르자 그리스도교가 크게 발전했고 또 그의 열성에 힘입어 가장 열심한 가톨릭 나라가 되었다.
발칸 반도의 불가리아는 9세기초에 비잔틴 교회로부터 복음을 받아들였고 (864 보리스 왕영세) 1000년 경에 확고하게 그리스도교화 되었다. 불가리아 교회는 로마냐 비잔틴이냐를 놓고 주저했었으나 결국 비잔틴을 택하고 동방교회에 예속되었다.
동구의 러시아는 9세기에 비잔틴 선교사들에 의해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 988년 블라디미르 왕이 개종하자 일약 국교가 되었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에게 예속됨으로써 후에 동방이교로 넘어갔다. 터키인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1453) 후 러시아정교로 자립, 모스크바 총대주교좌를 제3의 로마로 자처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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