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전성기란 교황이 세계를 지배하게 되면서 그리스도교 세계가 하나로 뭉쳐 십자군 운동을 일으키고 또한 종교와 교화, 대학과 학문, 예술과 수도생활 등 여러 분야에서 그리스도교 정신과 문화를 꾳피운 시기를 말한다.
그런데 교황이 세계를 지배하게 되기까지는 세속 권력으로부터 교회를 해방시키기 위한 이른바 그레고리오 개혁으로 불리는 속권과의 오랜 투쟁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 개혁은 먼저 빼앗긴 교회의 자유에 대한 새로운 의식의 변화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러한 자유에 대한 각성이 이미 수도회에서 시작된 성직자 생활의 개혁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이었다.
■ 클뤼니 개혁
중세 전성기를 예고하는 서곡(序曲)처럼 교회개혁운동이 10세기초 클뤼니(불란서 남부)수도원에서 먼저 일어났다. 무엇이 개혁이 되었는가를 말하기전에 왜 당시 수도원들이 개혁을 필요로 했는가부터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중세 봉건제도에서 교회도 자연이 경제 제도 밑에 들어갔다. 여기서는 토지가 권력의 중심 역할을 했다. 땅을 나누어 주어 거기에 성당이나 수도원을 세우게 했다. 그들은 그것을 사유재산처럼 간주하고 마구 매매하거나 상속했다.
그들은 또 수도원장도 멋대로 임명했고 그 가족들은 수도원에서 거처하며 상전 노릇을 했다. 그 결과는 뻔했다. 즉 수도원은 부유해지거나 아니면 페허가 되었고 또 속화되어 수도회칙이 문란해질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수도회의 개혁이 불가피해졌었다.
그러므로 클뤼니수도원은 바로 이런 패해들을 개혁의 목표로 내세우게 되었다. 그 개혁은 1, 엄격한 베네딕도회칙으로 되돌아가는 것 2, 수도원을 교황에게 직속시키는 것 3, 각 수도원을 협회로 총장밑에 통합하는것, 이렇게 세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클뤼니계의 모든 수도원이 로마에 직속되는 특별 면제를 받게 되었으므로 교구장은 물론 제후도 수도원에 관여할 수 없게 되었고 그 결과 원장의 선거가 자유로워졌다. 그리고 그때까지 고립되어 있었던 수도원들을 협회 체제로 통합하게 되니 중앙집권적인 통제도 가능해졌다.
이러한 개혁으로 말미암아 클뤼니수도회는 불란서에서 이태리, 독일 등으로 확대되면서 미구에 큰 세력으로 발전했다. 이 협회에 속하는 수도원 수가 11세기 중엽 근 2천개를 헤아리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초대 원장들이 다 성인들이었기 때문에 그 정신적인 영향은 더욱 컸다. 클뤼니 개혁이상은 수도자로부터 성직자로 확대되었고 마침내 로마에까지 영향을 미쳐 그레고리오 개혁을 낳게 했다.
■ 그레고리오 개혁
클뤼니 개혁은 성직자 생활의 개혁을 추구한데 그쳤으나 이제 그레고리오 개혁은 교회의 자유를 쟁취한다는 거대한 목표를 추구하게 된다. 그러나 이를 위해 성직자 개혁도 병행되었다. 이것이 그레고리오 개혁으로 불리는 것은 그것이 그레고리오 7세 교황에 이르러 결실을 맺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그의 선임자들에 의해 추진되어 온 것으로서 그레고리오는 그것을 완성시킨데 불과하다.
이 개혁사상은 이미 독일인 교황들 때부터 싹트기 시작했다. 1064년부터 잇따라 4명의 독일 교황이 교황좌에 올랐는데 이들은 모두 독일 황제 하인리히 3세에 의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이상하게도 교황좌에 개혁 바람을 불게 한 장본인은 다름아닌 독일 황제였다.
글레멘스 2세에서 시작된 독일 교황들은 한결같이 개혁사상에 불타있었다.
그들은 클뤼니 수도자였거나 적어도 그 수도원과 자주 접촉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개혁 목표는 주로 성직매매의 금지와 사제 독신제의 준수, 두가지였다. 이러한 개혁은 특히 레오 9세(1049-1054)때 교황 수위권의 강조와 더불어 강력히 추진되기에 이른다.
레오 교황은 교회 개혁을 위해 추기경단을 조직하고 훔베르트와 힐데부란드(후의 그레고리오 7세) 같은 유능한 사람들을 불러들여 개혁에 참여시키고 협조케 했다. 또 그는 당시 성행되던 성직 매매와 사제결혼의 폐해를 근절시키기 위해 자주 교회회의를 개최하고 그것을 금지시켰다. 그의 이런 많은 활동 때문에 교황의 수위권과 그 보편적 의의가 크게 향상되었다.
독일 교황 이후의 교황들도 선임자의 정신을 따라 개혁을 추진해 나아갔다. 니콜라오 2세는 1059년 교회회의에서 성직매매와 사제결혼을 다시 금지시키는 동시에 새로운 교황선거령을 의결시켰다. 이제 교황의 선거가 추기경단에 위임되었고 그 결과 교황좌의 자주성이 법적으로 보장되기에 이르렀다. 이 선거법은 그후 3분의2이상의 다수결, 콘클라베 등 여러차례 보완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개혁들은 마침내 그레고리오 7세에 이르러 풍성한 결실을 맺게된다. 일찌기 클뤼니 수도자였던 추기경 힐데브라드는 이미 레오 9세 이래 5명의 교황 밑에서 개혁의 기수로 활약했었다.
그는 체구는 작았으나 강한 정신력과 의지 그리고 예리한 정치력을 지닌 지도자였다.
그레고리오는 교황이 되자 선임 선임 교황들이 시작한 개혁에 착수했다. 그는 교회회의를 소집하고 성직매매와 사제의 결혼을 다시 금지시켰다. 그는 대처 사제에 대해 성무집행의 정치, 그런 미사에 신자들의 참여를 엄금하는 등 강력히 대항했다. 동시에 그는 성직매매나 사제결혼의 근원이 속인(俗人)들이 성직을 서임한데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그것을 근절시킬 것을 주요투쟁 목표로 삼았다.
그레고리오의 교황직의 표어는「정의와 평화」였다. 정의를 바탕으로 한 세계질서의 실현, 그것이 그의 꿈이요 최종 목표였다.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교황직에 주어진 사명에 대한 신념의 표현으로서 그는 1075년 「교황권의 지상론」 (교권이 속권위에 있다는)을 공포했다. 요컨대 황제도 평신도로서 교회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성직 서임을 대항해 투쟁하겠다는 일종의 선전포고와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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