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 1,34)
천사의 말에 마리아는 반문했습니다. 자신 안에 솟구치는 의구심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신과 하느님 앞에서 솔직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마리아의 의구심에 대한 가브리엘 천사의 대답은 ‘꾸중’이 아닌 ‘믿어야 할 이유’였습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5-37)
천사의 마지막 말이 마리아의 모든 의구심을 걷어버린 듯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마리아의 이 응답은 “예!”하는 ‘믿음의 긍정’이었습니다. 이 믿음은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대한 맹목적 순종이 아닌, 하느님의 힘과 크신 계획에 대한 온 삶을 바친 자발적인 응답이었습니다.
이로써 ‘주님 탄생 예고’ 사화는 고대 왕들의 ‘탄생 신화’와는 근본적으로 그 성격을 달리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정해진 운명에 대한 수동적인 복종이 아닌, 자유롭고 자발적인 결단이며 투신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응답은 한 사람의 인생, 나아가 전 인류의 역사에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위대하고 아름다운 행위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알프스 산자락에서 만났던 할아버지를 떠올려봅니다. 그분은 성경의 하느님을 거부하는 듯했지만, 실은 자신과 양들의 안위를 위해 하느님의 힘을 믿고 기도하며 의탁하는 신앙인이었습니다. 비록 예수님을 향한 의식적인 신앙은 아니었지만 ‘믿음’이라는 자세 안에서 마리아와 연대하고 있었으며, 볼렌스키 교수님은 그것을 보셨는지 “흥미롭군요”하셨던 것입니다.
막연히 믿기 어려운 이야기라 생각해온 ‘주님 탄생 예고’ 사화를 신앙의 눈으로 다시 읽으며, 우리는 인류 구원의 역사가 한 소녀의 ‘보십시오’하는 믿음을 통해 실현되었음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역사가 우리들 각자의 ‘보십시오’를 통해 우리의 역사가 된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특별히 요구되는 것은 ‘용기’가 아닐까 합니다. 마리아가 놀라움과 두려움, 의구심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했던 용기 말입니다. 믿음이 우리 안에 자라기 위해서는 수련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마리아처럼 우리의 믿음 역시 모호함, 두려움, 의구심, 어둠의 시간을 지나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믿음이 더 단단해지고 굳건해져야 합니다.
지금 우리 중 누군가가 시련의 시기, 어둠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면, 믿음을 더 자라게 하기 위한 은총의 시간이라 생각하고 다시 힘을 내어봅시다. 우리보다 앞서 이 길을 걸어간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이 길을 동행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 위대한 신앙의 길을 끝까지 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신뢰’와 ‘용기’, ‘항구함’과 ‘솔직함’일 것입니다. 두려움을 이겨내고 나를 항구하게 주님께 의탁하며 맡겨드릴 수 있는 신뢰와 용기를 청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