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럴 줄 알았으면 세례를 늦게 받는 건데!”
무슨 말일까요? 세례를 받으면 다 끝나는 줄 알았는데, 막상 세례를 받고 나니 신자로서 해야 할 의무도 많고, 하지 말아야 할 일도 참 많고 불편하니, 차라리 평생 동안 나 하고 싶은 것 실컷 하며 살다가, 죽기 바로 전에 세례를 받았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죠? 세례를 무를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이런 생각 앞에서 미소를 짓게 되는 것은, 그것이 우리 마음을 어느 정도는 대변해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세 중심적 신앙’은 내세에서 받을 복락에만 관심을 두게 되어, 이 세상에서 보내는 시간을 무의미하게 만듭니다. 내세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에, 지금 이 현세의 삶에서 하느님과 신앙이 무의미하게 됩니다.
‘현세 기복주의 신앙’은 ‘유용성’이라는 차원에서 하느님을 대합니다. 하느님은 자판기와도 같아서, 평소엔 내 삶과 무관한 분이지만, 내게 필요한 것이 생길 때 그것을 주시는 ‘유용한’ 분이십니다. 결국 하느님과 ‘거래’를 하게 되고 그분을 협상의 대상으로 여기게 됩니다.
둘 모두 ‘신앙’이라는 이름만 붙어 있을 뿐 진정한 의미에서 신앙은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께 기도를 올리면서도 우리는 내심 이런 생각을 갖습니다. “설마, 들어주시겠어?”
우리는 냉담자들이 다시 성당에 나오기를 바라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만, 우리 스스로가 ‘잠재적 냉담자’인 것은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잠재적 냉담자’가 아닌 ‘실천적 냉담자’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무늬만 신자일 뿐 실제는 하느님과 무관한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단 하나의 기적, 그것은 ‘믿음의 기적’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느님께서 자유로운 분이심을 인정할 때 가능합니다.
예, 하느님은 자유로운 분이십니다. 그분을 자유롭게 놓아드려야 합니다. 그분은 나의 욕망과 바람에 좌지우지될 분이 아닙니다. 만약 그분을 자유롭게 놓아드릴 수 있다면, 우리 역시 자유로울 것입니다. 우리가 만들어놓은 거짓 하느님, 우상과 싸울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내 삶에서 놀라운 방식으로 활동하시는 그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며, 그분께 의지하며 알 수 없는 미래를 맞닥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예, 그분께서는 처음부터 우리와 함께 계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처럼 우리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을 뿐, 그분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십니다. 만약 그분을 알아볼 수 있는 ‘신앙의 눈’을 갖는다면, 우리는 그분의 ‘현존’만으로 모든 것이 족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바로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는 분이시며, 우리를 향한 그 크신 사랑으로 당신 아드님을 통해 당신 자신을 선물로 우리에게 주신 분이심을 깨달을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