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4월 1일 남방천주교 청년회기관지「천주교회보」 로 창간, 교회신문의 효시를 마련했던 가톨릭신문이 올해로 65돌을 맞았다. 일제식민지배ㆍ8ㆍ15해방ㆍ6ㆍ25 등과 같은 역사의 구레속에서 교회와 모습을 함께 해온 본보는 그간의 65개 성상을 되짚어 보면서 가톨릭신문과 함게 격동의 세월을 살아온 동갑내기를 찾아 보았다. 서울ㆍ대구ㆍ원산ㆍ평양의 4개교구에 10만명을 겨우 넘는 초라한 교세, 일제식민치하에서 심한 제약을 받던 1927년 당시 본보와 함께 태어나 교회안에서 삶을 같이한 제주교구 김창렬 주교ㆍ서울대교구 혜화동본당을 찾아 65년세월의 이야기를 들어 본다.
◆제주교구장 김창렬 주교
가톨릭신문, 흔들림없는 교회종합매체
제주개발 반대에 큰 역할
“복음 바탕둔 가톨릭적 성격 다졌으면”
제주의 은총 교회전체와 나누고 싶어
『가톨릭신문은 창간 이래 지난 65년 동안 교회안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신자들에게 성교회에 대한 소속감을 불어 넣어주고 교회와 신자들의 성화에 큰 도움이 돼 왔다고 생각합니다. 또 가톨릭신문은 지난 65년이라는 세월 동안 바위위에 세워진 성교회의 모습을 상기케 할 정도로 역사의 격동에도 신문 본질이 왜곡되거나 퇴색되지 않고 성장해 왔다고 봅니다』
4월 1일자로 창간 65주년을 맞이하는 가톨릭신문과 「동갑내기」 인 제주교구장 김창렬 주교는 같은 세월을 살아온 가톨릭신문을 이같이 평가하고, 가톨릭신문 창간 65주년을 함께 기뻐했다.
『그동안 우리 한국교회내에는 교회내외의 내용을 다루는 몇몇 언론이 있었지만 가톨릭신문과는 달리 모두들 시대의 흐름에 너무 가까이 접근하면서 실패만을 거듭해온 것을 지켜봤었다』 고 지적하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가톨릭신문은 지난 65년간 흔들림없이 한국교회내의 유일한 종합적 상호 커뮤케이션 수단을 도맡아 올 정도로 아주 막중한 역할을 해오고 있다』 고 강조했다.
현대 사회에서 매스컴의 중요성을 역설한 김주교는 한국교회 언론의 역할에 대해 언급하면서 『현재 한국교회에는 대사회적인 교회매체가 거의 전무한 상황이다』 면서 『대 사회적 성격을 지닌 신문이 교회내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유 유무를 떠나 아쉬울 뿐』 이라고 말했다.
또 김주교는 『현대는 모든 분야가 전문화되고 분화되고 있는 만큼 하나의 매체가 모든 역할을 무리없이 수행하기는 힘든 일』 이라면서 『가톨릭신문이 모든방면에서 그 역할을 충실히 해오고 있지만 가톨릭신문과 성격과 분야를 달리하는 교회내 다른 매체의 창설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 고 피력했다.
지난 1927년 1월 25일 출생, 53년 사제서품을 받고 85년 주교로 서품된 이래,우리나라 최고의 관광지일 뿐 아니라 온갖 미신행위가 횡행하고 있는 섬 제주도를 사목하고 있는 김창렬 주교는 신앙생활을 저해하고 있는 많은 요소들을 제거하면서 성교회 건립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김주교는 『제주교구는 성직자 수가 20여명에 불과하고 사목지역 또한 좁아 성직자와 평신도들이 가족적인 분위기로 생활하고 있다』 면서 『제주교구는 이를 토대로 신앙안에서 꾸준히 성장 발전하고 있으며 모든 제주도민에게도 좋은 인상과 지도자적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고 소개했다.
『제주교구는 사제단과 가정적인 일치, 본당간의 친교와 협력 등 하느님의 은총을 충만히 누리면서 신자 증가와 함께 교세가 확장되고 있다』 고 밝힌 김주교는 『특히 지역에 따라 다른 다양한 미신이 행해지고 있는 섬이라는 취약점과 함께 세계적으로 알려진 국내 최대의 관광지라는 점 때문에 파생된 퇴폐가 만연한 가운데서도 성직자들의 노력과 신자들의 생활 표양으로 이를 극복하고 있다』 면서 제주교구가 받는 하느님의 은총을 한국교회 전체와 나누고 싶다고 밝혔다.
또한 정부의 무작정적인 제주개발 반대에 가톨릭신문이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을 지적한 김주교는 『정부가 추진중인 제주개발은 물질과 정신적 개발이 균형적으로 이루어질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사회개발이 된다』 면서 『제주도의 개발도 이를 토대로 진행돼야 하며, 도덕과 미풍, 분배정의의 희생위에 이루어지는 개발은 안된다는 원칙은 지켜져야 한다』 고 강조했다.
한편 김주교는 『가톨릭신문이 시대의 상황에 따라 더욱 발전하고 지면이 다양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재정적인 뒷받침이 필요할 것』 이라면서 『한국교회와 더불어 가톨릭신문이 더욱 성장 발전하기 위해서는 기업가들이 교회를 지원한다는 측면에서 가톨릭신문에 영업광고 제공과 함께 신자들의 구독을 증가가 수반돼야 할 것』 이라면서 교회내 모든 구성원들의 관심을 촉구했다.
마지막으로 가톨릭신문의 내용이 안고 있는 문제점에 대해 언급한 김주교는 『가톨릭신문의 가톨릭적 성격을 더욱 분명히 했으면 한다』 면서『지금도 잘해 나가고 있지만 논설이나 칼럼뿐 아니라 모든 기사에 이르기까지 지면 전체가 복음에 바탕을 두고 또한 선교를 지향하여 제작돼야 함을 강조하고 싶다』 고 덧붙였다.
◆서울대교구 혜화동본당
교회역사 지켜온 종가집
6개 자본당ㆍ수십개 본당 분가
최초로 현재교무금제도 확립
「성가소비녀회」창설, 문화자산도 풍부
약현(중림동) 종현(명동)과 더불어 서울의 3대 본당의 하나로 성장하면서 한국 가톨릭교회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어머니 같은 존재인 서울대교구 혜화동본당(주임ㆍ박순재 신부) 이 올해로 본당창설 65주년을 맞았다.
1927년 10월 7일, 지금의 종로구 혜화동 일대에 독일에서 진출해 있던 성베네딕도 수도회의 목공장을 빌어 미사를 봉헌하기 시작했던 혜화동본당.
혜화동본당은 그동안 서울대교구의 종가본당으로서 6개의 직접적인 자본당과 수십개의 분할본당을 탄생시키며 한국교회의 중흥과 그 궤를 같이해 왔다.
특히 혜화동본당은 일제 식민지배와 민족해방, 6ㆍ25동란 등 파란의 역사와 한국교회의 성장을 동시대에 공유하면서 한국천주교 발전에 견인차 역할을 어김없이 수행해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뮈뗄 주교의 초청으로 1909년에 독일에서 진출한 베네딕도 수도원이 덕원으로 옮겨가면서 물려주고 간 낡은 건물에서 미사를 봉헌하기 시작한 혜화동본당은 그 당시 1백50명의 신자에서 현재 약8천명의 신자와 인근의 동성 중ㆍ고등학교, 가톨릭대, 가톨릭청소년회관 등을 관할하는 거대본당으로 자리잡는 발전을 거듭했다.
태종때의 공신 조은이 이곳에 잣나무를 많이 심어「백동 (栢洞)」이란 별칭이 더 유명한 이곳 혜화동본당은 초대 본당신부로 파리 외방전교회의 지베드로 신부가 부임하게 되면서 본당의 기초를 다지는 작업과 신학교 건축공사 등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지신부는 본당재임시 불란서에서 신품종 포도를 도입, 이를 전국에 확산시켰으며 요즘 안성지방의 명물인 포도가 이때 도입된 것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그후 최초의 방인사제였던 서기창 신부를 비롯, 오기선 신부 등이 본당을 맡게된 이후 본당사목 전반에 활기를 띠게 됐으며 최초의 평신도단체인 안나회와 여자성가대, 가톨릭 청년회, 혜화유치원 등의 설립을 보게됐다.
또 제4대 본당신부로 지난 2월 26일 선종한 성재덕 신부가 부임, 교무금과 주일헌금을 자발적으로 바치는 제도를 한국에서 최초로 만들어 현재의 교무금제도를 확립했으며 43년에는 신앙심 깊은 처녀들을 위한 수녀원으로 현재의 「성가소비녀회」 를 창설하기도 했다.
혜화동본당은 또 6ㆍ25동란으로 공산군의 점령을 당해 혜화동성당이 군량미를 보관하는 장소로 변했고 최초의 방인사제 였던 서기창 신부의 피살순교 등의 우여 곡절을 겪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후 혜화동본당은 숙원이었던 성전신축 건립을 위한 기성희를 조직, 회장에 장면박사를 추대하고 그후 6년만인 1960년에 노기남 주교 주례로 신축성당을 축성했다.
신축성전에는 예수그리스도를 중심으로 4복음 사가의 상징을 조각한 거대한 화강암 부조와 주보인 성베네딕도 성인의 입상을 종탑에 부각시켜 대성전으로서의 장엄미를 돋보이게 하였다.
이러한 성전의 신축으로 외면적인 현대화를 이룩한 혜화동본당은 본당의 혁신과 내실화에 본당사목의 역점을 두기 시작했으며 본당에서는 최초로 선거를 통한 본당총회장과 상임위원을 선출하는 선례를 남기기도 했다.
또한 혜화동본당은 67년 5월 4일부터 3박4일간 서울 성수동성당에서 카이모씨를 비롯한 필리핀의 꾸르실리스따들의 지도로 실시된 제1차 꾸르실료 교육에 21명중 유수철 본당신부를 비롯한 8명의 평신도를 참가시켜 요즘 크게 발전한 한국 꾸르실료 운동의 산파역을 담당하게 됐다.
특히 혜화동본당은 고 박희봉 신부 재임당시 우리의 자랑스러운 신앙선조로서 그당시 복자로 시복된 1백3위 복자들을 모두 한폭에 그린 성화가 없었음을 지적, 한국사, 교회사, 복식사, 전례 등 각계 전문을 구한후 심혈을 기울여 「1백3위 순교복자 성화」 를 제작, 84년 여의도 행사때 공식적인 「1백3위 성인 성화」 로 이용하기도 했다.
성당의 제대후면 벽에는 특수 도자 (陶磁) 즉 세라믹으로 단장하였으며 제대 남쪽 창문은 스테인드 글라스로 치장, 「보석같이 아름답고 밤하늘같이 영롱한 광선들이 우리 마음을 기쁘게 해주는 성당이 됐다」 는 찬사를 받았다.
이처럼 혜화동 본당은 한국교회의 성장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왔을뿐 아니라 이에 걸맞게 예술적 가치가 돋보이는 14처, 103위 성화, 세라믹 벽화, 4복음사가 부조 등을 간직하고 있는 본당으로 풍부한 문화적 자산을 소유하고 있다.
혜당동본당은 전통적으로 대학교수, 예술인신자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으며 문화와 예술의 거리인 대학로가 인접해 있어 일찍이 젊은이들의 활동이 두드러진 본당으로도 손꼽히고 있다.
무엇보다도 혜화동본당은 예수성심 신학원이 1929년에 이곳으로 옮겨온 이래 성직자 양성의 터전이된 유서깊은 곳이 됐으며 앞으로도 한국교회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갈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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