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직서임권(聖職敍任權) 싸움
주교직이나 수도원장직 같은 성직을 서임하는 권한을 놓고 교황 즉 교권(敎權)과 황제, 즉 속권(俗權)이 서로 논쟁을 하고 마침내 싸움까지 벌이게된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교권의 당연한 권한으로 여겨지는 이 권한이 당시는 국왕이나 황제, 다시 말해서 속인(俗人)들에 의해 행사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교회는 봉건사회에 속해 있었으므로 교구나 수도원 땅이 나라 땅으로 간주되었다. 다시 말해서 주교는 그 땅을 영주(領主)인 제왕(帝王)으로부터 나누어 받은 격이었다. 게다가 주교는 동시에 그 영토를 다스리도록 국왕으로부터 위임 받은 제후(諸候)구실도 했다. 그러므로 제왕들은 주교 제후의 서임을 정치적 주권자인 자기들의 당연한 권리로 생각했다.
그러니 주교는 원래 영적 지도자이다. 따라서 주교직의 서임은 교황의 당연한 권리이고 여기에 속권의 관여가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이 교회의 주장이었다. 이 논쟁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는 교권과 속권 중 어느 것이 우위에 있느냐에 있었다. 그래서 각기 자기 권한의 우위론을 내세웠다. 황제측은 제권이 신(神)에 기인한다는 주장(제권신수설 帝權神授說)을 하며 이른바 전통적인 황제교황주의를 지속시키려 했고 교황측은 교권이 속권 위에 있다는 이론에 근거하여 교권 위주의 신정정지를 펴려 했다.
이런 논쟁으로 이미 오래전부터 교권과 속권이 대립되어 오던 중 마침내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 이르러 투쟁으로 확대되었다. 그것은 그레고리오 교황이 교황권의 우위론을 강력히 주장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는 교권의 우위론을 발표한데 이어 1075년 속인에 의한 성직서임을 엄금하고, 만일 어길 경우 파문도 마다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대해 황제 하인리히 4세는 독일 주교들을 소집하고 거기서 교황의 폐위를 선언했고, 교황은 즉시 파문으로 응수하고 또한 황제에 대한 충성 서약에서 신하들을 풀어주었다.
교황의 파문은 큰 충격을 일으켰다. 독일 제후들은 만일 황제가 1년 이내에 파문에서 사면되지 않는다면 그를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하인리히 4세는 알크스를 넘어 카놋사 성에 들어가 3일간 속죄를 하며 파문의 용서를 빌었다. 때마침 독일에 여행중이던 교황은 카놋사로 와서 황제를 용서하고 그를 파문에서 풀어주었다. 이것이 황제가 교황앞에 무릎을 끊어야 했기 때문에 역사에서「카놋사의 굴욕」으로 불리는 유명한 사건이다. 당장은 하인리히의 패배였다. 교황이 더 강자였음이 입증이 되었다.
독일 재후들은 교황이 황제의 파문을 풀어준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루돌프를 대립왕으로 내세웠다. 내란이 일어났다. 하인리히가 교황에게 대립교황으로 위협하자 교황은 그를 다시 파문하고 루돌프를 정식 독일왕으로 승인했다. 그러나 독인 주교단은 하인리히를 지지했고, 하인리히는 글레멘스 4세를 대립교황으로 내세웠다. 그러고는 로마로 진군(進軍)했다. 교황은 로마를 떠나 이태리 남부 살레르노로 피신했다. 그는 거기서 죽었다(1085. 5. 25). 그는 죽으면서 『나는 정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했다』그래서 귀양살이에서 죽는다. 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사실은 아니지만 어쨌든「정의와 평화」란 그의 표어가 시사하듯이 그의 생애를 잘 요약해 주는 말이다. 그레고리오 7세의 비운의 죽음은 패배자 같이 보였으나 사실은 승자였다. 왜냐하면 그의 사후 그의 개혁 이념은 계속 추진되어 미구에 교황권이 되기 때문이다.
■ 보름스 정교조약(政敎條約)
성직서임권에 대한 싸움은 그레고리오 교황이 사망한 후에도 계속된다. 그러나 마침내 교회와 국가 양측이 모두 양보함으로써 1122년 소위 콘코르다툼(국가와 교회 간의 협정)을 통해 원만한 해결을 보게 된다.
빅토리오 3세, 루르바노 2세, 파스칼 2세, 젤라시오 2세, 갈리스토 2세 . 이렇게 5명의 교황들은 한결같이 그레고리오의 정신을 따라 개혁을 추진했고 서임권에 대한 투쟁도 계속했다. 한편 황제들도 굴하지 않고, 특히 대립교황으로 위협하며 맞섰다. 그 결과 5명의 교황 재위중 5명의 대립 교황이 생겼다.
우르바노 2세는 한깨 로마를 떠나야 했지만 무엇보다도 십자군 운동을 서구공동체에 호소, 성사시킴으로써 교황이 그리스도교계의 실제의 우두머리임을 과시할수 있었다.
파스칼 2세 때 하인리히 4세와의 서임싸움이 재연되었다. 하인리히는 성직서임을 포기하려 하지않았고 그래서 교황은 그를 파문했다(1102). 그런데 1105년 하인리히 5세가 반란을 일으키고 아버지를 퇴위시키자 상황이 좀 달라졌다. 교황은 하인리히 5세를 승인했고 4세는 이듬해 교회와 화해하고 사망했다. 1111년 교회와 국가를 완전히 분리시킨다는 조건에서 파스칼 교황과 하인리히 5세 사이에 협약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교회와 국가의 완전 분리란 당시 상황에서는 너무나 이상적이어서 전혀 실현성이 없는 해결책이었다 . 실제로 그것은 독일 제후와 주교들의 반대에 부딪혀 부결되고 말았다.
갈리스토 2세에 이르러 새로운 타협안이 모색되었다. 그것은 주교가 지니는 주교와 제후의 두 직부를 대립시키지 않고 분리해서 서로 양보하는 중간 해결책이었다. 다시 말해서 영토를 수여하는 속권에 의한 서임과, 주교 성직을 수여하는 교권에 의한 서임을 구별하고, . 황제는 교권의 서임을 교황은 속권의 서임을 서로 인정하기로 했다그리고 영적 서임의 상징으로 주교 반지와 지팡이, 세속적 서임의 상징으로는 왕홀(王笏)을 넘겨 주기로 합의를 보았다.
이러한 타협에서 1122년 교황 갈리스토 2세와 황제 하인리히 5세 사이에 정요조약이 성립되었다. 이 평화 협정으로 1075년에 시작된 성직서임권 싸움이 마침내 끝났다. 이어 제국의회는 이 조약을 국법으로 승인했고 교회는 그것을 공의회에서 승인했다.
1123년 교황에 의해 처음으로 서구에서 개최된 제1차 라테란 (9차)공의회는 서임 문제 외에도 성직매매와 사재결혼의 금지 등 그간 꾸준히 추진되어온 개혁과 혁신의 원칙을 재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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