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책갈피에서 16년전에 고인이 된 친구의 사진이 나왔습니다. 나는 그 사진을 볼때마다 손에 들고 한참씩 옛 생각에 잠기곤 합니다. 스스로 말하듯 산도적같이 생긴 것과는 달리 마음은 약해 빠지고, 그래서 깊은 정을 베풀며 살다 간 친구입니다. 그는 별로 말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자기변명같은 것은 치사해서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남들로부터 오해도 많이 받았고 교만하다는 평도 들었습니다. 화나는 일이 생기면 평소에도 붉은 얼굴이 더욱 시뻘개지며 그저 계면쩍게 웃는 표정을 지을 따름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만 한 두 사람 자신을 이해해 주는 것으로 만족해 했습니다. 뭇 사람이 잘못 알고 그를 나무라도 별로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그럴 땐 바보같아 보이기도 하고 「참 무서운 사람이다」란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그와 군대생활을 같이 했습니다.
일반하사로 진급이 되어 내무반장이 되었는데도 군사령부라는 것이 워낙 선임자들이 많아서 항상 쫄병이었습니다.
그는 무슨 일로 본부에 가서 기합을 받고와도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일로 쫄병들을 못살게 굴어 벌주는 일도 없고 때리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몇몇 병사들은 그것을 알아차리고 오히려 미안해서 잘 하려고 했지만 어떤 병사들은 좀 무시하고 요령을 부려 얄밉게 굴기도 했습니다. 그에게는 아무리 잘못한 일이 있었더라도 거짓말만 하지 않으면 다 용서했습니다. 그리고 상부에는 모두 자기 책임으로 돌리고 사과하고 벌도 받았습니다. 그러던 그가 하루는 아주 시무룩해서 나를 찾아왔습니다. 처음으로 전 내무반원을 집합시키고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업드려 뻗쳐」시켜 놓고 때리기 시작했답니다. 다 때린 다음 또 아무소리도 하지않고 나 한테로 와 버렸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가슴이 꽉막혀 아무말도 못하겠고 계속 말하려 하다가 울먹일 것 같아서 문 밖으로 나와버렸답니다. 그리고는 갈 데가 마땅찮아 좀 떨어져 있었지만 나를 찾아 왔답니다. 그날밤 그는 괴로워하며 나와 함께 구내「주보」에서 막걸리를 늦게까지 마셨습니다. 그냥 맑은 정신으로 내무반에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내 생각 한쪽으로는 뒷 감당도 못 하면서 때린다음 그렇게 마음 아파하는 꼴이 측은하기까지 했습니다.
아무튼 그는 그런 식으로 군대생활을 마치고 제대 특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축하차 찾아 갔을때 그 내무반의 분위기는 옛날의 그것과 너무 다른 것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화기애애 하다」는 말이 걸맞고 또 그는 굉장한 인정과 존경받는 고참이었으며 제대하는 것을 모두가 아쉬워하고 있음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어떤 병사는 풀이 죽어 있었으며 또 이런 말도 햇습니다. 『김하사님은 내무 반장으로서 우리 내무반에 좋은 전통을 남겼습니다』. 아무튼 그는 자기 할 일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군대를 떠났습니다.
오늘 성지주일, 예수의 수난복음을 읽으며 문득 그 친구 생각이 났습니다. 그는 수난 후에 영광받은 예수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는 군중을 위해서 자신의 전부를 바쳤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백성의 잘못을 혼자 책임지고 백성을 향해서는 때로는 꾸짖고 때로는 감싸주고 가르치며 함께 살았지만 그를 알아주는 사람은 몇몇에 불과했고 대부분 사람들은 예수를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그 사람들 한테 십자가 형을 받아 죽고 묻혔습니다. 그의 삶은 무척 고독했지만 다만 몇몇 사람의 이해만으로 만족한듯 했습니다. 그는 말없이 혼자자기의 아픔을 이기며 속으로 삭혔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누구를 원망하거나 미워하지도 않았으며, 죽음의 순간에도 백성의 잘못을 하느님 앞에서 책임지며 변명하고 용서를 구하는 분이었습니다.
그의 죽음에 대한 반응은 갖가지였습니다. 율법학자나 바리세파 사람들은 앓던 이를 뺐을 때 같이 후련해 했고 빌라도와 로마 병사들은 어쩐지 불안해 했고, 제자들은 아쉬워 했습니다. 제자들은 그가 이스라엘을 압제로 부터 해방시켜줄 예언자로 알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루가24, 19~21), 그 때문에 제자들은 풀이 죽어 있었습니다. 어떤이는 그를 미쳤다고도 하고 바보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가고 2천년이 지난 오늘 아무도 그를 바보라고 하는 사람도 없고 미쳤다고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의 죽음 때문에 맥이 빠지고 풀이 죽은 게 아니라 오히려 기가 살아나고 있으며 크리스찬에게는 삶에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는 힘이 되고 있습니다.
죽은 친구를 생각하면 미안한 것이 한가지 있습니다. 장례식 추도사에서 『네가 이세상에서 다 이루지 못한 일은 살아 있는 우리가 다 맡을 테니 너는 안심하고 평안히 이 세상을 떠나거라! 그리고 먼 훗날 하느님 나라에서 반갑게 다시 만나자』 이 약속을 하나도 지키지 못하고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냥 오래 살기만 하면 무얼 하는가」하는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분명히 그는 내맘 속에 예수의 마음을 심어 놓고 머리속에는 예수의 상을 그려주고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내가 만일 죽었다면 친구들이 나를 어떤 사람으로 기억할 것인지 생각해 봅니다. 나는 나를 아는 사람의 머리와 마음에 무엇을 남겨놓았을까……그들의 머리속에는 『그 친구, 술 담배가 과하다 싶더니 또 친구들의 충고도 외면하더니 결국 그렇게 빨리 죽었군』 그리고 마음에는 『아직은 죽을 나이가 아니라 아깝다…』 정도? 그밖에는 별로 할 말이 없을 것 같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의 죽음 앞에서 나 자신의 죽음과 나에 대한 뭇 사람의 추억과 평가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면 크리스찬으로서 앞으로의 삶에 한가지 큰 지표가 생기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보니 내 이 친구는 이 세상도 성공적으로 살고 떠났습니다. 아직도 아까운 친구 하나를 일찍 잃은 내 마음이 깊은 내면으로부터 아려옴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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