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이 바로 그렇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나자렛의 젊은이다. 백성의 지도자들의 골머리를 많이 썩혀온 예언자이다. 그는 나귀를 타고 천천히 오고 있다. 그러나 그는 엄청난 환호를 이끌어냈다. 크나큰 희망을 안고있는 작은 사람들한테서.
그들은 『호산나. 도와주소서』하고 외치며 그를 환호했다. 승리를 상징하는 빨마가지들을 그의 길앞에 갈았다. 그들의 환호는 진실에서 나온 것이었다.
사도들에게는 엄청난 놀라움이었다. 그들은 이 입성을 원하지 않았었다. 이를 막으려 애썼다. 마태오복음 16장22절에 예수가 처음으로 당신이 예루살렘으로 갈것이라고 알려주었을 때 베드로는 극구 만류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심하게 꾸중을 들었다. 『사탄아. 물러가라』고.
세번째 같은 말을 들은 후 제자들은 포기한듯 조용해졌다. 토마스는 말했다.
『그러면 우리도 그와 함께 가서 같이 죽기로 하자』고. 그러나 예수는 당신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원로들과 제관들과 율사들로부터 많은 고난을 겪고 죽임을 당했다가 사흘만에 일으켜져야 한다고 선언했다.
■ “호산나-십자가에 못박으시오”
사람들은 예수를 환영해 주었다. 사도들도 이를 보고 좋아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도전으로 느껴졌다. 이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이를 막아야 했다.
빨마가지 뒤에 가시관이 따라오고 가시관 뒤에는 하느님의 영광이 온다.
「호산나」와 「십자가에 못박아라」.
『십자가에 못박아라』와 『호산나』는 아주 밀접하게 붙어있다. 대제관ㆍ원로ㆍ율사들과 그 백성은 온 인류를 대신해서 무대위에 서있다. 예루살렘 입성에서 일어난 일들은 결코 과거의 역사만은 아닌 것이다.
■ 예루살렘 입성-하나의 상징이다
전례적 축일가운데 성지주일처럼 하느님과 우리와 이웃들간의 관계를 잘 설명해주는 축일은 드물다.
성지주일의 행렬은 예루살렘 입성을 열심히 반복하는 것만은 아니다. 이날의 전례는 성주간 전체를 오늘 이 자리에 펼쳐보인다. 바로 성지주일에 언제나 생길 수 있는 물음을 던져준다.
『하느님이 우리 인생안으로 들어오도록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 그분이 오늘 우리들 도시에 오신다면
그분은 그때처럼 똑같이 오실 것이다. 사랑과 자비를 가진 분으로. 사람들의 행복을 항상 우선해주는 분으로, 굴욕당하고 겁을 집어먹은 사람들의 친구로서, 낫게 해주고 해방시키려는 분으로, 모든것보다 하느님의 뜻을 더 위에 놓는 분으로, 선택하도록 요구하는 분으로 오실 것이다.
그분이 오신다고 알려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까, 그분을 맞이하는 모습은 어떤 것일까, 그분에게 우리 그리스도교는 어떻게 보여질까, 감동도 적고 불평만 많은가, 신앙고백도 적게 하면서 탓만 많은가, 전교는 잘 안하면서 소시민적 신앙이 많은가.
빛을 발하지 못하고 너무 비관적인가. 용기는 없고 포기하고 있는가, 용기는 없고 포기하고 있는가,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다루기만 하는가, 열성은 부족하고 자기 주장만 많은가.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부정적인 면만 들추어내고 있다. 하느님의 백성은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교회지도자들은 더욱 그렇다. 사람들은 기꺼이 자기집 창문에 돌을 던지려 한다. 순례하는 하느님의 백성은 기쁨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 같다.
■ 그분은 다시 오신다
그리스도의 정신이 신자들에게 다시 돌아올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묻고있다. 그리스도교는 세상의 빛. 세상의 소금. 사회의 누룩이 되었는가? 「십자가에 못박히신」하고 한후에 「신은 죽었다」고 한 신학 이후에 호산나가 다시 오는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받으소서』하고 다시 부르는가?
하느님이 세상사람들에게 다시 들어오실 것인가? 주님이 거기 계신다는 것을 확실히 볼 수 있는 그날이 올 것인가? 우리가 살고있는 도시와 마을에 예수의 입성이 이루어질까? 성지주일이 올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컴백(Comeback)이 다시 있을 것인가.
하느님백성의 역사를 보면서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포기를 막을수 있고. 두려움을 없앨 수 있으며 가까이 들여다보면 많은 희망이 보인다. 하느님 백성 속에 하느님 백성이 형성되고 교회안에 교회가, 동네에 그리스도 공동체가 생겨난다. 그리스도교 세포들이, 성숙한 신자들이, 감동적인 신자들이 자라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주 죽었다고 믿었던 하느님이 항상 다시 오셨다. 오늘날에도 신자들의 희망을 일깨우는 일들이 많이 있다. 하느님은 오늘도 자기 백성안에 예언자들의 잠을 깨우고 있다. 하느님이 이렇게 오심은 아직은 성공적이거나 빛을 발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한테는 이것이 아직 작은 씨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신자들은 기대한다. 성장시켜주시는 분은 하느님 이시기에.
우리 인생안에, 우리 교회안에, 이 세상에 하느님이 들어오심을 우리는 환호하고 희망을 갖는다. 이것이 성지주일의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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