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계명이 제일 큰 계명이냐 (마태22, 36: 마르12, 29) 또는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느냐 (루가10,25)하는 기본적인 질문을 한 율법학자는 자기 꾀에 말려들었다.
언젠가부터 예수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하느님 나라를 전파하며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의 교설과는 다른 교설을 전파하며 안식일법 등 여러 가지 율법들을 거부하는 듯 한 교설을 펴는 것을 보고 율법학자는 예수의 본심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혹은 이런 질문을 던져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했을 가능성도 있고 또는 명성이 이미 널리 퍼져 있던 예수와 자기의 율법실력을 드러내 보이려고 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여튼 예수님의 대답은 간단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 사람과 이웃 사람이며 이 둘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율법학자는 물러서지 않고 자기의 똑똑함을 보이려고 질문을 계속하였다: 『이웃이 누구냐』고. 이런 종류의 질문은 학식있는 사람이 얕보는 사람과 토론하다가 불의의 현답에 직면했을 때 자동적으로 나오는 질문이다.
빌라도 재판관으로서 죄인예수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엉뚱한 대답을 듣고 이런 종류의 질문을 하였다. 『진리가 무엇이냐』고 (요한18,38). 우리네 사회에서는 이웃이란 나와 가까운 사람을 가리킨다. 같은 동네에 사는 사람, 친분이 가까운 사람등이 이웃이다. 유대아인들은 율법에 따라 모든 이스라엘동족, 이스라엘민족과 어울려 사는 외국인 (레위 19,34) 특히 이스라엘의 하느님 신앙을 받아들인 외국인 개종자들을 이웃으로 꼽았다.
예수님의 이웃에 관한 가르침은 종족을 넘어서 종교의 구별없이 아담의 후손이면 누구나 다 이웃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은 그 어떤 사람이라도 이웃이 된다. 이 가르침을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하여 실감나게 가르치셨다.
인류역사상 이러한 이웃개념을 제시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가 첫 사람이며 오직 그 분만의 가르침이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도 내려가는 여행을 하고 있었다. 이 여정은 해발 8백미터의 예루살렘 고원지대를 출발하여 요르단의 계곡을 향하여 내리막을 치닫는 길로서 팔레스티나의 경관으로서도 빼놓을 수 없는 지역이다. 이 길은 중간에 베타니아의 추억을 남기는 작은 촌락을 제외하고는 거의가 광야에 속한다. 요르단 건너쪽지방의 상품을 실어 나르는 당나귀나 낙타의 대상이 가끔 이 길을 지난다. 그러니 언제 무례한 강도떼가 나타날지 모른다.
이 길을 유대아인들은 아두밈 언덕이라고 부르는데(여호15, 7) 「피의 언덕」이라는 뜻이다. 성 예로니모에 따르면 로마인들이 이 길 중도에 여행객들을 보호하기 위한 군막(軍幕)을 설치했었다고 한다. 그 후 이 군막은 대상(隊商)들이 묵어가는 여인숙이 되었다. 예수님이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이야기할 때 청중은 누구나 이상과 같은 지리역사적 배경을 그림처럼 머리에 떠올리고 있었다.
이 길을 여행하던 어떤 사람이 강도떼를 만나 가진 것을 다 빼앗겼을 뿐 아니라 호되게 얻어 맞아 반죽음이 되었다. 여기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은 그 강도들이 여행객을 털고 무엇이 부족하여 그 사람을 반죽음을 해놓고 달아 났을까 하는 문제이다. 아무도 피해자가 반항했을지도 모르고 자기네들을 고발하지 못하게 하느라고 그런 짓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여행자는 누구였을까. 그 길은 유대아인도 다니고 이방인인 사마리아인들도 다닌다. 대부분의 성서주해자들은 유대아인이라는 의견이 강하다. 그래서 유대아인의 이웃은 유대아인뿐이 아니고 사마리아인도 이웃이다. 다시 말하면 원수도 이웃이라는 교훈이 이 비유에서 강력히 드러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생기면 지금 우리사회의 관심은 범죄자 체포여부가 관심거리가 되지만 이 비유 이야기에서는 피해자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태도가 관심거리로 등장한다. 이것은 인간들의 나라에서는 범죄자를 처벌함으로써 사회를 바로 잡으려 하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사랑으로 사회를 옳게 이끈다는 예수의 교훈을 말해주기로 한다.
먼저 제관이 지나 가고 레위인이 지나간다. 이들 계급은 민족의 거룩한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제사를 지내고 율법을 지킴으로써 거룩한 족속에 속했다. 이들은 예리고로 가는 길이었다. 예리고는 제관들이 많이 사는 도시였다. 피해자는 예리고로 가는 길이었으니 어쩌면 지면이 있는 사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거룩한 사람들은 못 본체하고 피해지나갔다. 자기네들 직무와 무관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피해자가 죽은 줄 알고 시체에 손을 대서 부정을 타지 않으려는 율법준수가 이유일 수도 있다.
그 길을 지나간 세번째 사람은 사마리아인이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아인들이 경멸하는 이교로 취급을 당하고 있었음은 이미 말한바 있다 (대목37~39). 율법도 모르는 이 사마리아인은 피해자를 보고 인간으로서의 할일을 다 한다. 포도주와 기름으로 상처를 치료해 주고 자기 말에 태워서 가까운 여인숙으로 데리고 간다. 여인숙이 길가 어디에 있었는지 알수 없지만 강도를 당한 곳은 인적이 없는 곳이었고 여인숙은 강도들의 침입이 없는 예리고 근처였을 것이다. 그러니 그 길은 좀 멀다. 이 먼 길을 그는 걸어서 가고 피해자는 나귀에 태워갔다. 인간애 발로의 극치이다. 그 뿐이랴. 여인숙에서 두사람 숙박비, 치료비까지 내고 볼일보러 다시 떠나간다. 그리고도 돌아오는 길에 더 든 비용을 약속하고 갔다.
이제 피해자에게 누가 이웃인지는 자명해졌다. 사랑을 실천하는 자만이 거룩한 사람이라는 획기적인 교훈이 생겼다. 오리게네스는 이 비유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발견하였다. 길가던 사람은 아담을, 예루살렘은 낙원을, 예리고는 세상을, 강도들은 악인들, 제관은 율법, 레위인은 예언자, 착한 사마리아인은 그리스도를, 상처는 죄악, 짐바리짐승은 주님의 몸, 여인숙은 교회를, 여인숙주인은 교회의 수장을 가리킨다고 해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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