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자군(十字軍 1096~1270)
교회의 주도하에 팔레스티나 성지 탈환을 목적으로 서구 그리스도교 세계가 함께 행한 군사원정. 이것이 십자군이다. 그런데 그 참가자들이 어깨에 십자 표시를 했으므로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
예루살렘은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리되면서 동로마 제국에 속하게 되었다가 637년 아랍인에게 점령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지 순례는 계속될 수 있었고 또 그 수가 10.11세기에 크게 늘었다.
그러나 1071년 회교도인 셀주크 터키족이 예루살렘을 점거하자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즉 터키인들은 성묘성당을 파괴하고 순례를 못하게 막았다. 막을뿐더러 순례자들을 괴롭히고 박해했다. 그래서 순례자들의 불평과 호소가 끊이지 않게 되었다. 한편 비잔틴 제국도 상황이 긴박해지자 여러 번 교황에게 군사적 도움을 요청해왔다.
상황이 이러할 때 프랑스 클레르몽에서 1095년 교회회의가 열렸다. 마침 프랑스에 여행중이던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이 회의에 참석. 성지와 순례자들을 보호하고 또 동방 제국과 그것의 신자들을 구출하는 동시에 이교(1054년에 분열된)도 해소시키자고 호소했다.
교황은 호소는 예상 밖의 열광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그 신앙과 종교적 열광은 많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2세기간 지속되었다. 성지를 탈환하고자 이슬람교인들에 대한 군사적 집단 운동이 일어났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다』는 교황의 말은 십자군 전사들의 표어가 되었다.
이와 같이 십자군의 동기는 첫째로 종교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군사적인 것이었고 또 그것이 그리스도교적 기사도 (騎士道)와 결부되었다. 그래서 성지의 재정복이 하나의 포교로 간주되었다. 말하자면 성전(聖戰)과 같은 것이었다. 여기에 문제가 있었다.
근 2세기 동안 파견된 십자군의 회수는 일반적으로 8회(소년십자군은 제외)로 본다 아래 우선 각 십자군을 간단히 서술하고 총평에서 그 결론을 내려볼까 한다.
■ 제1차 십자군(1096~1099)
부이용의 고드프레와 보두앵 형제를 위시한 주로 프랑스의 기사제후들로 조직된 십자군이 출발했다. 그들은 3년만에 예루살렘을 점령하는데 성공하고 그 곳에 예루살렘 왕국(1099~1291)을 세웠다.
■ 제2차 십자군(1147~1149)
이것은 성 베르나르도의 열렬한 설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프랑스와 독일 왕들이 처음으로 참전했다. 그러나 목표였던 예루살렘을 함락 위기에서 구해내지 못하고 터키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 제3차 십자군(1184~1192)
그간 빼았긴 예루살렘을 다시 탈환하고자 계획된 십자군으로서 먼저 독일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출발했다. 그러나 그는 목적지에 이르기 전에 강물에 빠져 죽었다. 프랑스왕 필립 2세. 영국왕 리처드 1세도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데는 실패했다.
■ 제4차 십자군(1202~1204)
가장 불행한 십자군이 되었다. 왜냐하면 베네치아의 상인들이 주도한 십자군이 본래의 목표인 성지로 가지 않고 콘스탄티노플로 가서 그 도시를 약탈하고 황폐화시켰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곳에「라틴제국」을 세웠으나 그것 또한 오래가지 못했다. (1261멸망).
■ 소년 십자군(1212)
거듭되는 십자군의 실패는 그것이 어른들의 죄 때문일 것이라는 회의를 낳게해 죄없는 소년 소녀들의 십자군을 불러 일으켰다. 프랑스와 독일에서 수천명의 소년 소녀들이 고향과 부모를 등지고 십자군길에 올랐다. 그러나 그것은 도중에 아사. 난파. 노예로 팔리는 등 무서운 비극으로 끝났다. 이것만 보더라도 당시 십자군에 대한 종교적 열광이 어떠했는가를 쉽게 짐작할수 있다.
■ 제5차 십자군(1217~1221)
헝가리. 오지리. 바이에른. 노르웨이 등에서 이집트 원정을 계획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 제6차 십자군(1228~1229)
이것은 황제 프레드리히 2세의 개인계획이었다. 그는 협상을 통해 군사적으로 예루살렘을 회복할 수 있었으나 잠시에 그쳤다.
■ 제7차(1248~1254). 제8차 십자군(1270)
이 두차례의 십자군은 프랑스왕 성 루이(9세)의 업적이었다. 그는 십자군의 종교적 성격을 회복시키고자 직접 십자군을 지휘하고 이집트 원정에 나섰다. 이집트를 거쳐 성지를 점령할 심산이었다. 그러나 거기서 완전 패배하고 한때 포로까지 되었다. 1270년에 다시 시도했으나 튀니스 부근에서 페스트에 걸려 사망하고 말았다.
이로써 위대했던 십자군 시대가 막을 내렸다. 더 이상의 십자군이 실현되지 못했다. 벌써 서구의 공동체 정신이 붕괴되기 시작함으로써 교회도 그 호소력을 상실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 십자군 운동의 평가
십자군은 그 의의. 정당성. 성과 등 전체적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고 그 평가도 찬반으로 엇갈리고 있다.
우선 군사면에서 엄청난 희생에 비해 그 성과는 미미했다. 뿐더러 그간 거두었던 성과도 예루살렘이 완전히 함락되고(1244) 예루살렘 왕국도 멸망함으로써(1291) 다 수포로 돌아갔다.
물론 이념면에서는 이득도 있었다. 그 첫째로 서구에서 그리스도교적 공동체 의식이 강화된 사실을 들수 있다. 그러나 이것도 소년 십자군. 유대인 박해에서 나타난 것처럼 충분히 그리스도교적이 못되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문화와 학문. 신심 분야에서의 이득은 비교적 컸다. 십자군을 통해 비잔틴 문화와 아랍 문화가 서구에 소개되었고. 특히 스콜라학을 촉진시켰다. 또 복음의 순수한 청빈 정신이 환기되고, 새로운 타입의 기사수도회를 탄생시켰다. 한편 군주들의 권세욕. 상인들의 금전욕. 군인들의 잔인성 등이 너무나 자주 그리스도인의 명예를 손상시켰다. 콘스탄티노플에서의 십자군의 약탈은 동서 교회의 분열의 폭은 심화시켰을뿐더러 십자표마저 증오하게 만들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터키를 위시해서 회교국들은 적십자사 표장으로 붉은 십자 대신 붉은 반달표를 사용하고 있다. 교회가 칼을 잡은 것이 참으로 하느님의 뜻이었을까. 어쨌든 「십자군」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길」이 되었을 것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