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혁 베네딕도 수도회
클뤼니 수도회는 최초의 개혁 수도회로서 교회에 개혁 바람을 일으키면서 10―11 세기에 큰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저명한 성 유고 원장이 사망하자(1109) 점차 그 열기가 식으면서 기울기 시작했다. 그것은 수도원들이 부유해지고 수도자들이 태만해졌기 때문이다. 규칙이 해이되고 노동이 등한시되고 미식을 일삼는 등 한마디로 많은 수도원이 퇴폐해졌다. 그래서 사람들이 수도회의 개혁을 열망하게 되었다. 본래의 엄격한 베네딕도회칙으로의 복귀. 청빈과 침묵 그리고 노동의 재강조가 개혁의 주요 목표가 되었다.
시퇴회는 몰렘의 로베르가 1098년 프랑스 시토에 수도원을 세운 것이 개혁 수도회의 시작이 되었다. 그러나 그 개혁은 1112년 베르나르도 성인이 이 회에 입회함으로써 비로소 개화(開花)되었다. 베르나르도가 시토회의 제2의 설립자로 불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30명의 동료를 이끌고 시토수도원에 들어간 베르나르도는 3년후 클레르보에 새 수도원을 세우고 직접 그 원장식을 맡았다. 이 수도원은 그의 뛰어난 인격과 추진력 때문에 프랑스를 넘어 벨기에와 라인 지방으로 발전. 그의 생존당시 벌써 38개의 수도원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런데 시토회는 강력히 요구하지 않았고 각 수도원에 고유한 자치권을 인정했다.
베르나르도는 첫째로 수도자였다. 그러나 그의 활동과 영향은 수도원의 한계를 훨씬 넘는 것이었고 또 그것은 12세기가 그의 세기로 불릴만큼 지대한 것이었다. 실로 그는 그 시대를 주름잡은 중세의 위대한 인물의 하나였다. 그는 설교를 통해 그 시대의 종교적 교회적 쇄신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미 본 바와같이 2차 십자군은 순전히 그의 설교에 힘입은 것이었다. 그는 또 교회 학자로서 그의 깊은 신학 지식으로 당시 유명했던 아르노의 이단을 굴복시켰다. 또 그는 소위 아나클레토 이교도 종식시켰다. 실제로 그는 국왕들과 자주 교제했고 교황들에게 권고도 했다. 그의 영성과 고통의 신비 사상은 중세 후기 서구의 신비주의의 기초가 될만큼 큰 영향력을 미쳤다. 그래서인지 그는 「꿀과 같은 학자」로도 불린다. 그는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성모공경을 강조함으로써 성모 신심 보급에도 크게 기여했다. 요컨대 그는 위대한 개혁가요 신학자였다. 그러나 첫째로 수도자요 성인이오 신비가였다.
카르투지오회는 독일 쾰른 출신 참사회원이었던 브루노 성인에 의해 1084년 프랑스 그르노블 근방의 험준한 계곡에서 창립을 보았다. 베네딕도회칙을 기반으로 하여 거의 절대 침묵을 요구하는 옛 은수생활의 이상을 갱신한 것이다.
이 회는 그 엄격성 때문에 전파가 느렸고 그래서 회원이 많아 본적이 없다. 그들은 기도와 명상으로 항상 참된 종교심과 내적힘을 유지했다. 그들은 중세 후기와 종교개혁도 극복하고 존속되었다. 그래서 『카르투지오회는 개혁된적이 없다. 변질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는 말까지 생겼다. 이밖에 이 시기의 개혁수도회로는 성 로무알도가 세운 가말리회를 들수있다.
■ 재속성직자 수도회
중세의 재속(교구)사제의 처지는 오늘과는 판이했다. 우선 그 수가 많았고. 교육 수준은 백명의 겨우 한명이 학교 구경을 했을 정도로 매우 낮았다. 교리 지식도 경험에서 얻은 것뿐이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공동체 생활만이 이렇게 안일하고 타락한 교구사제들을 구할 수 있다고 판단했고 그래서 그들에게 일정한 규칙을 만들어 주어 공주생활을 시켰었다.
그후 이것을 모방하여 우선 주교좌 성당의 사제들이 성직자단을 구성하고 동공생활을 했다. 이들은 또 사유재산도 포기하고 수도 서원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들을 수도 성직자로 불렸다.
그러나 점차 수도 성직자들의 생활이 해이되면서 서원과 공동생활을 거부하고 사유재산도 포기하지 않게 되었고 그래서 개혁이 불가피해졌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수도 성직자들에게 회칙의 준수와 사유재산의 포기를 강력히 요구했다. 이에 응한 사람들은 수도참사회원이 되었고 나머지는 재속 참사회원으로 불렸는데 이들에게도 공동생활만은 의무적이었다.
이 수도참사회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것이 1120년 로베르트 성인에 의해 프레몽트레에서 성직자의 성화와 사목을 목적으로 삼고 독립된 수도회로 발족한 프레몽트레회였다. 로베르트는 막드부르크 대주교가 되자 그의 수도자들을 동부 독일로 오게 했다. 그후 그들은 개척과 포교를 통해 크게 성공하면서 지역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 기사 수도회
수도생활에 기사도의 군인생활이 결합되어 이루어졌기 때문에 기사수도회로 불리는 중세기의 독특한 이 수도회들은 모두 십자군을 계기로 성지에서 탄생했다. 주요한 것으로는 요한 기사수도회. 성전 지사수도회. 독일 기사수도회 등 셋이다.
요한 기사수도회는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자(1099) 그곳의 요한 병원에서 병자 간호의 형제회로 발족했고 이어 1120년에 기사수도회로 개편되었다.
예루살렘이 다시 빼앗기고 이어 예루살렘 왕국도 멸망하자 키프로스, 로스섬 등으로 전전하다가 마침내 말타섬에 정착했다. 그래서 말타 기사수도회로도 불린다.
성전 기사수도회는 1118년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에서(그래서 성전기사수도회) 프랑스 가사들에 의해 창립되었다. 이 회 역시 후에 키프로스섬으로 이전했다. 그런데 이 회는 재산이 많았던 관계로 그것을 탐낸 프랑스왕 필립 4세에 의해 1312년에 해산당했다.
독일 기사수도회는 처음에 독일상인들에 의해 양로사업의 형제회로 발족, 1198년에 기사수도회롤 개편되었다. 13세기초 프로이선으로 이전, 수도회 국가를 이루고 크게 번성했으나 종교개혁으로 프로테스탄트로 넘어갔다.
기사수도회는 수도생활에 군사적 요소를 첨가했다는데 의의가 있다. 그러나 십자군 정신의 위축과 더 불어 이것 또한 침체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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