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기도문」이 마태복음서와 루가복음서가 좀 다르다는 것은 이미 대목 71에서 지적한 바 있다. 대목 71~72에서는 주로 마태오의 주기도문을 분석, 해설했다.
마태오에 있어서는 주께서 기도를 가르치신 때를 전교일정과 관계없이 산상교훈이란 제목속에 들어 있고 루가의 경우에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여러 가지 교훈을 내리시고 혼자서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실 때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한 요청의 응답으로 주기도문을 가르치신 것으로 되어있다.
이것이 언제 어디서 이루어졌는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다. 마태오의 경우에는 주의 기도가 다른 주제들과 함께 독립된 가르침으로 나열되어 있는 반면 루가에 있어서는 기도가 제자들에게 주는 가르침의 주제가 되어 있을 뿐 아니라 (루가는 기도하는 예수상을 돋보이게 한다 : 3, 21: 5, 16: 9, 29: 10, 21: 11, 1: 22, 32 : 22, 41) 하느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신다는 확신을 받아주신다 (11, 5~13).
마태오는 기도하는 방법에 역점을 두면서 이교도들마냥 여러 말을 장황하게 늘어 놓지 말라는 주님의 경고 말씀을 소개한다. 당시 이방인들은 일정한 신을 섬기지 않고 많은 신들의 이름을 주어 섬기면서 무의미하고 긴 주문을 외었다.
이교도들의 기도에 관한 말씀은 마태복음서 (6, 7~8) 에만 나오는 글귀로서 마태오는 이교도들처럼 장황하게 늘어놓는 기도를 하는 유대아인들을 겨냥한 것 같다. 그들은 매일 회당에서 18개의 축복기도를 읽었는데 사도시대에 와서 교회에서 이런 형식의 기도문을 하지 못하고록 하였다.
번지르하고 길게 늘어놓아야만 하느님께서 기도를 들어 주시는 것은 아니다. 기도는 순수한 마음가짐과 참으로 하느님께 전적으로 신뢰하는 심성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라야 된다. 하느님은 우리가 말씀드리지 않아도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 다 아신다. 그러니 오히려 우리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 것인지를 헤아려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올려야 할 기도는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문에 중요한 것이 요약되어 있다. 이 요약된 주의 기도는 사도시대의 교회안에서 공동체기도를 올릴 때에 사용하였다.
마태오의 기도문과 루가의 기도문이 좀 다른 것도 이런 이유에서 그렇게 된 것이다. 마태오의 기도문은 7가지 청원으로 되어 있고 루가의 기도문은 5가지 청원으로 되어있는데 아마도 성서원문에는 루가의 것이 원본인듯 싶고 마태오는 예수께서 다른 데서 말씀하신 것을 집어 넣어 교회용 기도문으로 사용한 듯 하다는 것이 학자들의 의견이다.
둘을 비교해 보면「(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서 괄호부분은 마태오가 즐겨 쓰는 아버지께 대한 예수의 호칭이고 (마태 6, 1 :6, 14)「우리」가 붙은 것은 개종한 유대아인들이「이스라엘의 하느님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요셉의 하느님」이라고 부르던 것을 대신하여 우리의 하느님이란 뜻으로「우리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사도교회에서는 하느님을 부를 때 그저「아버지」라고 불렀다 (로마8, 15 : 갈라4, 6). 예수께서는 그저 아버지라고 부르기로 하였고 (주로 루가복음서에서)「나의 아버지 (마르14, 36 : 요한8, 54) 「너의 아버지」(마태6, 4)「너희들의 아버지」(마태5, 48: 6, 8 : 6, 15 : 6, 26) 를 구별없이 쓰였고 특히 마태오복음서에서「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마태6, 26 : 23, 9) 란 호칭을 쓰셨다.
마태오 기도문의 세번째 청원「당신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는 루가에는 없고 마태오기도에만 있는데 이말은 예수의 마지막 기도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태26, 42) 와 같다.「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는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데만 걸쳐져 있는 것이 아니고 기도 상반부 전체에 걸쳐져 있다. 즉「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고, 나라가 이룩되고, 뜻이 이루어 지소서」하는 뜻이다.
아버지의 뜻은 창조이념의 실현을 말하는 것으로「하늘에서」는 천상세계를 말하기로 하고 자연질서계를 말할 수도 있다. 하늘과 자연에는 질서가 창조이념대로 진행되고 있지만「땅에서」는 즉 인간세계에서는 인간으로 인하여 창조이념이 망가지고 있다. 이를 회복하는 것이 예수의 절원이며 우리의 염원이다.「일용한 양식」이 되는 빵은 요한복음서 6, 31~35절에 있는 대로 생명을 주는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빵을 뜻하여 후대 교회에서 성체성사를 뜻할 수도 있고 신앙생활에 전념하는 교회가 매일 필요한 먹을 것을 요청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당시 유대아인들이 식전기도에서 우리의 물질생활을 하느님께 맡기는 내용을 읽을 수 있다 :「하느님은 은총과 사랑과 자비심으로 살아있는 모든 피조물을 먹여 살리시니 찬미받으소서」. 종교인의 입장에서 하느님께 비는 물질적 은혜는 우리 생활에 필요한 만큼만 청하는 것이 온당한 청원으로 인정되었다 :「나에게 궁핍도 부유함도 주지마시고 오직 필요한 만큼만 마련해 주소서」(잠언30, 8).
마태복음서에서는「오늘 일용한 양식」을 청하고, 루가복음서 에서는「날마다 필요한 양식」을 주시라고 했는데 학자에 따라 혹은 종말론적 미래를 내다보는 청원이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내일을 생각할 것 없이 지금 오늘 필요한 것만 요구하는 청원이라고 하기도 한다.
죄를 용서해 달라는 청원에서 마태오는 아라메아어에서 죄를 빚으로 표현한 대로 빚진것과 죄지은 것을 같은 뜻으로 빚이란 말로 일관하였고 (마태18, 23~35참조) 루가는「우리에게 빚진 자를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하소서」라고 하였다. 이것은 이교도들을 향한 복음이기 때문이 일것이다.
죄의 용서의 조건은「너희가 용서하지 않으면 너희 아버지도 용서하지 않는다」(마태18, 35) 라는 말씀이 반영되었다. 마지막 청원은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해달라는 것인데 이것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신앙을 가졌다가 환란에 못 이겨서 말라 시드는 씨앗을 연상시키며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 (마태26, 41) 에서 당신 자신과 제자들이 유혹을 이기게 해달라는 기도의 반영이다.
「악에서의 구출」은 마태오 첨가로서 교회가 악의 세력을 물리치고 예수의 구세은혜를 입게 해달라는 청원이다. 초대교회는 마태오의 기도문을 하루 세번씩하도록 지시했다. (디다케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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