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권(敎權)과 제권(帝權)의 다툼
성직서임권 논쟁은 다행히 교회와 국가가 서로 양보하고 타협함으로서 원만한 해결을 보았다 (1122 보름스 협정).
그러나 완전한 해결은 불가능했으므로 교황과 황제 사이의 대립은 그 후에도 계속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논쟁의 대상이 한 차원 높은 교권과 제권의 논쟁으로 확대되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 세계 제국을 지배하는데 있어서 교황과 황제중 누구의 지배권이 더 높으냐는 즉 수위권의 다툼이었다.
교회는 교황의 지상권을 주장하면서 그 이론적인 근거를 소위「양검론」 (兩劍論)에서 찾으려 했다. 그리스도교 세계의 우두머리인 그리스도는 세계지배를 위해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권력으로 상징되는 두 자루의 칼을 각각 교황과 황제에게 맡겼다는 것이다 (루가22ㆍ38).
그런데 여기에 교황 그레고리오 7세때부터 교황에게 유리하게 새 해석이 가해졌다. 즉 세속권력도 교황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어서 실은 하나의 칼뿐이라는 해석을 내렸다. 그래서 세속의 정치권력과의 충돌을 초래하게 되었다.
실제로 독일의 호언슈타우펀 왕가에서 강력한 황제, 세계사적 인물인 소위「붉은 수염」의 프리드리히 1세가 등장하면서 교황들과의 충돌이 노골화되었다. 황제는 세계지배를 꿈꾸면서 이를 위해 카알 대제의 로마제국 이념을 소생시켜 그것을 바탕으로 황제지상주의의 이른바 황제 교황주의를 다시 관철시키려 했다. 이에 그는 로마와 이태리를 제국에 예속시키고자 우선 북부 이태리를 침략하고 정복했다. 이로 인해 황제는 그를 황제로 대관한 (1155) 유일한 영국인 교황 하드리아노 4세와 충돌하게 되었다. 이어 다음 교황 알렉산델 3세에서 만만찮은 적수가 나타나게 되자 일찍이 그레고리오 7세와 하인리히 4세 때보다 더 격렬한 싸움이 20년간 (1157~1177)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교황의 파문에 황제는 대립교황으로 맞섰다. 대립교황이 4명이나 나왔고 이 때문에 알렉산델은 황제의 무력 앞에 두번이나 프랑스로 피신해야 했다. 그러나 황제를 제외하면 거의 전 서구에서 알렉산델을 지지했고 게다가 황제군이 북부 이태리에서 패하게 되니 (1176) 황제는 결국 1177년 베네치아에서 교황과 평화조약을 맺고 화해했다. 이로써 성권(聖權)과 속권(俗權)의 다툼은 교황의 승리로 끝났고 동시에 대립교황으로 인한 이교도 완전히 사라졌다. 이어 알렉산델 교황은 1179년 3차 라테란 공의회 (11차 공의회)를 소집하고 거기서 위의 평화조약을 승인시키는 동시에 3분의2 이상의 다수결을 요하는 새로운 교황선거령을 의결시켰다. 그것은 이후 교황선거에 있어서 황제의 간섭을 완전히 배제하고 또한 이교의 발생을 사전에 막기 위한 조처였다.
한편 프리드리히 1세는 제3차 십자군 원정에 함께 나섰다가 도중에 사망했다 (1190). 그의 사망후 하인리히 6세가 남이태리 시칠리왕을 겸하게 되자 로마가 다시 남북에서 협공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겨우 3세의 왕자를 남기고 32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1197). 이제 교황에 대항할만한 상대는 아무도 없었다. 이리하여 교황권이 그 절정에 이르러 세계를 지배하게 된다.
■ 교황의 세계 지배
교황 인노첸시오 3세 때(1198~1216) 교황권이 대내ㆍ대외적으로 절정에 이르러 그리스도교 서구 세계의 지배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물론 그것은 첫째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교황권에 더없이 유리했기 때문이지만 그러나 교황 자신의 능력 또한 결코 간과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인노첸시오는 비록 37세란 젊은 나이에 교황이 되었을지라도 법학자로서 탁월한 판단력과 강한 책임감, 놀라운 활동력을 겸비한 무엇보다도 타고난 지배자였다.
대외적인 정치면에서 인노첸시오는 교황령을 역사상 최대의 판도로 확대하고 그 기반을 확고히 했다. 그는 이중 선거를 계기로 독일의 왕위 계승문제에도 개입했다. 처음에 오토를 지지했으나 그가 시칠리 정책을 다시 관철시키려 하자 그를 폐위시키고 대신 그가 후견(後見)하던 프리드리히 2세를 독일왕으로 승인했다. 그러나 승인 조건으로 남부 이태리를 독일에 병합시키지 않는다는 서약을 받아냈다. 이로써 이태리의 자주 독립이 보장되었다. 인노첸시오는 또 프랑스왕이 아내와 이혼하려 하자 이에 강력히 항의했다. 또 영국왕이 교황이 임명한 캔터베리 대주교와 대립하자 이에 성무금지, 파문, 파직으로 맞섰고 결국 왕이 굴복, 교황을 봉건 군주로 받아들였다. 비단 영국만이 아니고 스페인, 포르투갈, 헝가리, 폴란드 등이 교황의 종주권(宗主權)을 인정하고 그의 속국이 됨으로써 명실공히 그리스도교 세계의 지배자가 되었다.
인노첸시오의 업적은 대내적인 면에서도 혁혁했다. 무엇보다도 그가 주재한 1215년의 4차 라테란공의회 (12차 공의회)는 중세 최대의 공의회인 동시에 (참가자 1천2백명) 교황권의 절정을 상징하듯 역사상 가장 화려한 공의회가 되었다. 여기서 십자군 원정이 결의되고 알비파 이단이 단죄되었다. 그밖에 성체의 본질변화, 적어도 1년중 한번의 고해, 영성체의 의무 등이 이때 결정되었다.
인노첸시오는 사제인 동시에 왕이었고 교황인 동시에 황제였다. 비록 그가 청빈을 솔선수범했다 할지라도 사제보다는 왕이었고 성인보다는 교황이었다는 비난을 면키 어려운 것은 당시 종교와 정치가 필요했을지는 몰라도 너무 결합되어 있었던 때문일 것이다.
인노첸시오의 사망후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과의 약속을 어기고 시칠리를 독일에 병합시켰고 십자군원정도 거부했다. 이때문에 그는 교황 그레고리오 9세로부터 두번이나 파문당했다. 그러자 황제는 로마를 점령했다.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프랑스로 피신해야 했다. 그러나 교황은 리옹에 공의회(13차)를 소집하고 황제를 파문하고 폐위시켰다. 황제는 계속 투쟁했으나 결국 죽음이 그것을 가로 막았고 (1250) 이리하여 싸움은 교황의 승리로 완전히 끝났다.
슈타우펀 왕가의 마지막 대인물인 프리드리히 2세와 더불어 이 왕조는 곧 멸망했고 동시에 독일제권도 영원히 재기불능이 되었다. 교황권은 비록 승리는 했으나 미구에 그 권위가 위태로워질 정도로 큰 타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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