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대목「무례한 친구의 요청」비유는 루가복음서에만 나오는 것으로 주께서 제자들에게 기도의 형식을 가르치신 다음 기도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같아도 항구하게 기구해야 된다는 것을 인간사회에서 무례할 만큼 끝까지 구하라는 가르침이다.
그런데 비유의 이야기 내용 설정이 우리에게는 좀 부자연스러운데가 있다. 우선 한밤중에 잠자는 친구집에 가서 빵을 달라고 요청하는 사람은 자기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여행중에 있는 자기 친구를 위하여 무례한 요청을 한다는 것은 이야기 설정으로는 좀 어색하다.
여기에 설정된 사람은 세 사람이다. 「너희 중 한 사람에게 친구 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에서「너희중 한 사람은 확실히 제자를 가리킨다. 그 제자에게 친구 한 사람이 여행중에 찾아왔다. 제자는 여행중의 친구를 위하여 이웃 친구를 찾아가 빵을 좀 달라고 한다.
이야기는 제자와 이웃 친구사이에 대화가 이루어지고 여행친구는 뒷전으로 숨어버렸다. 그것은 아마도 하느님 나라의 지상에서의 실현을 기구하는 주의 기도를 감안할 때 그 정신을 따라 사는 사도교회가 곤궁에 처한 사람을 보살피는 임무를 강조하기 위한 것일 것이다.
한 친구가 긴 여행을 하다가 집에 들렀는데 집주인은 그에게 내 놓을 먹을 것이 없어서 당황한다. 팔레스티나에서는 흔히 밤에 여행을 한다. 물론 도보여행이다.
그 친구가 찾아든 시각은 한 밤중이었다. 이 집은 외딴곳이어서 가게가 있는 것도 아니고 각 집마다 부인들이 해가 뜨기전에 한식구가 그날 먹을 빵을 굽는다. 그러니 한 밤중에는 빵이 떨어지기 일쑤이다.
팔레스티나에서는 밤 12시면 초저녁잠이 들때이다. 집따라 잠이 든 사람도 있고 아직 침상에 들지 않은 사람도 있다. 여행손님을 받은 이 집은 잠자다 깨었다는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직 자지 않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 나라에서는 옛날에 그랬듯이 찾아 온 손님을 대접하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기분좋은 봉사행위였다. 우선 배고픈 여행자에게 먹을 것을 내 놓아야 한다.
이러한 손님 대접 관습으로 볼때 이 집은 꽤나 가난했을 것이다. 집주인은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하여 이웃 친구를 찾아 가기로 마음먹었다. 이웃집은 이미 문을 닫아 걸고 온 집안이 잠들고 있었다.
가난한 시골집은 잘 때 문을 닫아 걸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이 집은 문을 담아 걸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비교적 잘사는 집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큰 저택은 아니다. 온 집안이 단칸방에서 줄줄이 누워서 잔다. 아직 깊은 잠에 빠지지 않은 시각이라 한 사람만 깨어서 꼼지락거려도 온 집안이 다 잠을 설친다.
현재의 독자들은 여행자가 찾아온 집주인이 자기가 받아 들일 수 없으면 이웃집을 소개하여 직접 가보라고 했을 터인데 왜 자기가 직접 나서서 법석을 떠느냐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 여행자가 자기의 친구라고 했고 이웃집도 친구라고 했으니 그럴만 했고, 또 직접 상관없는 일에도 손수 나서서 일처리를 하는 것은 옛날 사람들의 사고방식이었다.
성서학자 뷰지의 해설에 따르면 우리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주석을 하고 있다. 첫번째로 손님을 받은 친구는 이웃 친구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을 것이다. 손바닥으로 문을 두들겨도 온 집안 사람들을 깨우기에 충분하다. 만일 잠이 너무 깊이 들어서 깨지 않으면 돌멩이를 집어서 문을 두드린다고 한다. 그래서 팔레스티나의 집대문에는 돌멩이 자국이 나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래도 실례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고 문이 열리면 집에 들어가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집밖에 서서 큰 소리로 이야기한다고 한다.
이웃집에 찾아간 광경을 이러한 상황에서 상상하면 우리와는 엄청 다르다. 그는 잠자는 사람을 깨워서「친구」라고 부른다. 가까운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정을 이야기하고 빵 세개를 달라고 요청한다.
왜 하필이면 세개의 빵이냐하는 문제의 해설이 학자들간에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이는 여행자는 혼자가 아니고 동반자가 있다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빵 세개는 삼위일체를 상징한다고 강론에서 풀이했다. 빵 세개는 배고픈 사람을 먹여 배불리게하는 양심으로 성부ㆍ성자ㆍ성신을 가리킨다고 했다. 이 해석은 묵상용으로 강론자료는 될 수 있어도 성서해석은 아니다.
적절한 해석은 빵 세개가 여행자의 한끼니 분량이라는 해석이다. 이 밤중에 세개씩이냐라는 항의가 없는 것으로 보아 적절한 해석일 것이다.
잠을 깬 친구는 빵이 없다고 거절하지 않고 귀찮게 구는 친구를 나무라며 거절한다. 여기서 우정과 귀찮음의 갈등이 있다. 웬만한 우정이 아니면 귀찮음을 극복할 수가 없다. 그래도 자꾸 귀찮게 졸라대면 실은 우정이 화로 변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한번의 귀찮음에 짜증을 내던 우정이 집요하게 졸라대는 귀찮음에 화내지 않고 우정을 발동하여 귀찮음을 극복하는 것으로 제시된다. 이 비유에서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우정을 표상적으로 가르치려고 하기 때문이다.
구하라 받을 것이며, 두드려라 열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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