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 듣는다. 나는 내 양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라온다』(요한10, 27). 오늘 복음성서의 이 비유는 우리에게 큰 감명을 줍니다. 목자는 양을 먹이가 풍부한 초원으로 인도하고 위험으로부터 생명을 지켜주고 그외에도 여러가지로 돌봐줍니다. 그래서 양들도 그 목자를 알아보고 주인의 음성도 식별하며 전적으로 위탁하고 따른다고 합니다.
양은 목자를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또 목자는 이런 양떼를 위하여 목숨을 걸고 지켜준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는 이런 목자로서 자기 양떼를 잘 돌본다고 합니다. 그래서 크리스찬은 목자인 그리스도를 기억하며 감격하고 감사합니다.
그런데 목자가 양떼를 어떻게 치는지 별로 본 적도 경험도 없는 나로서는 별로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내가 본 양떼들은 무질서해 보이고 양들이 모두 생각보다 더러웠다는 기억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분명히 양떼 비유를 말하지 않고 다른 비유를 들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강아지 예를 들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말하자면『나는 강아지들의 착한 주인이다. 내 강아지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 듣는다. 나는 내 강아지를 알고 그들은 나를 따라온다』. 그러고 보니 이 비유가 내게는 훨씬 실감나고 훌륭한 착안이란 생각이 듭니다. 나는 개를 키우기 때문에 개에 대한 경험이 많습니다.
개는 주인에게 대단히 충직한 동물입니다. 그리고 언제라도 나를 좋아합니다. 병이 들어 며칠을 굶어서 기운이 하나도 없으면서도 죽는 순간까지 내 목소리를 듣고는 꼬리를 흔들었습니다. 낯선 손님이 오면 내 눈치를 보고 약간이라도 싫어하는 눈치가 있으면 제가 먼저 으르렁거리며 경계를 합니다. 혹시 내 몸에 손이라도 댈라치면 짖어서 난리가 납니다.
양과 개를 비교해 보면, 개는 양보다 훨씬 빨리 주인의 말을 알아듣고 수동적으로 따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꼬리를 치고 능동적으로 따릅니다. 내가 뒷뜰 개 집앞에 나타나기만 하면 멀리서도 좋아서 낑낑대며 빨리 제곁으로 오라고 부르짖습니다. 어느 누가 나를 이렇게 한결같이 좋아하고 환영할까…? 그리고 개는 무엇보다 주인이 곤경에 처했을 때 최선을 다해서 주인을 지킵니다.
현대는 그리스도에게도 양보다 개를 필요로 하는 시대인듯 합니다. 양떼를 치는 목자들도 혼자서 치는 것이 아니라 몇 마리씩 개를 데리고 다니며, 개들은 주인의 뜻대로 양떼를 몰아 양들이 대열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지킵니다. 만일 개들이 이임무를 제대로 못하면 목자 혼자서는 어쩔 수 없을 것이란 생각도 듭니다. 양들은 주인의 의도를 개 만큼 빨리 알아 듣지도 못하고, 더구나 주인의 위험을 설마 외면 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알아 차리지 못합니다.
오늘은 성조주일 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그리스도의 양들을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돌볼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을 기억하고 또 보다 많은 젊은이들이 이 부르심에 응답하도록 기도하고 노력하기로 결심하는 날입니다.
이 시점에서 나는 그리스도의 개가 되어 그리스도의 양떼를 흩어지지 않게 돌보고 그리스도의 뜻을 양들에게 전하고 또 그리스도께 닥치는 현세적 위험에서 그분을 보호해야 할 책임을 다시 절감하게 됩니다.
정치적 권리는 교회를 집단의 힘으로 보고 이용하려 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자신의 도구로 만들려 합니다. 물질만능주의는 신앙도 돈으로 해결하려 하거나 헌금액을 신앙의 척도로 보려하고 또 자기중심주의는 그리스도를 세상살이의 방편이나 삶의 액세서리로 대우하려 합니다. 이러한 사조는 이미 교회 안에도 깊숙히 들어와 진정한 신앙과 신앙인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내적으로 채워지지 못한 영성이 외적 화려함으로 채워질 수 없음을 안다고 하면서도, 부활절의 지나치게(?)화려한 꽃장식에서 허전함을 느낌은 왠 일인지…? 이 화려함이 은총으로 인한 참기쁨의 정직한 표현이라면 좋을텐데…, 또 성당을 크게 지었기 때문에 만족하고 행사를 성대하게 했기 때문에 자랑스러워 함으로 끝나버린다면 이 모든 것은 외적인 것으로 내적인것을 채우려 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신앙을 액세서리화하여 신앙인을 형식적으로 이끌 위험이 있게하고 그리스도에게는 현세적 위협으로 다가 오게 할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현대는 양의 무리가 커짐에 따라 보다 많은 성소자를 필요로 할 뿐 아니라 성소자의 임무도 광범위해졌기 때문에 더욱 충실한 성소자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그리스도교 모든 신자는 이 성소에 참여하고 있음을 기억할때입니다.
이 시대는 시키는 대로만 살아가는 신자가 아니라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요구하는 때입니다. 청원의 기도를 할때도 화끈하게 하고 빨리 응답이 없으면 주님께 보채고 재촉도 해야겠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주님을 기쁘게 할 것입니다.
나도 꼬리만 두어번 흔들고 내 처분만 바라는 개보다 괴성을 지르며 철창을 펄쩍펄쩍 뛰어 오르는 개 앞으로 먼저 가면서 흐뭇해 합니다.
오늘 성소주일에, 나는 개한테서 주인을 어떻게 따르고 섬겨야 하는 지를 배우게 됩니다. 주님을 가까이 하려는 열정과 주님을 대신해서 양떼를 보살펴야 할 임무에 대한 충실과, 그리고 주님께 위험이 닥칠때에 결연히 나설 수 있는 용기를 두루 갖춤으로, 성소에 충실한 많은 성소자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나는 감히 이렇게 제의합니다. 오늘 복음성서의「양」을「개」로 우리끼리 고치면 안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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