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자를 고문까지 하며 다스린「종교재판」이 이단에 대한 부정적인 대답이었다면 복음적 청빈에서의 탁발이란 새 수도회의 출현은 그 긍정적인 대답이었다. 왜냐하면 13세기의 이단, 특히 알비파는 물론 위험한 사상이었으나 동시에 부요한 교회에 복음적 가난으로 되돌아갈것을 요구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씨시의 프란치스꼬는 그들의 이러한 요구를 일부 받아들여 탁발수도회를 세웠다. 그러나 그는 알비파처럼 부와 세속을 경명하지 않고 오히려 청빈사상으로 그것을 단념하고 극복하는 길을 가르쳤다.
탁발수도회는 재래의 수도회와는 다른 타입의 수도회였다. 첫째 새 수도회는 수도자 각자만이 아니고 공동체, 즉 수도원까지도 사유재산을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탁발 수도자들은 정말로 가난하게 살려했다. 그러나 노동만으로는 살수가 없었기 때문에 동냥(탁발)에 의지하게 되었다.
둘째는 수도자가 일정한 수도원에 속해야 했던 소위「정주」(定住) 의무가 사라졌다. 이제 수도자들이 모든 수도원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었으므로 그 행동범위가 훨씬 넓어졌다. 세째 탁발수도회는 도시에 적응된 수도회였다. 그것은 도시에 이단자와 가난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도시 선교와 도시 사목이 발전하게 되었다. 네째 탁발수도회는 총장을 우두머리로 한 강력한 중앙집권제였고 그래서 모든 수도원들로부터 더 효율적인 협력을 얻어낼 수 있었다. 중세에 생긴 탁발수도회는 프란치스꼬회를 위시해서 도미니꼬회, 가르멜회, 아우스티노 은수사회 등이다. 그 중 앞의 두 수도회를 2대 탁발수도회라고 한다.
■ 방지거회와 도미니꼬회
프란치스꼬회의 창립자인 아씨시의 프란치스꼬는 1182년경 아씨의 한 부유한 모직물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젊은 시절을 자유분방하게 보냈다. 그러던중 전쟁에 나갔다가 포로가 되어 포로생활을 했고 이어 중병에 걸렸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프란치스꼬는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다. 그는 가진 것을 모두 포기하고 거지처럼 가난하게 살며 산 다미아노에서 은수생활을 시작했다. 아버지가 그것을 막자 아버지와도 이별했다. 이어 포르시운쿨라 성당을 재건하고 그 근방 오두막집에 거처하며 가난을 설교했다. 하루는 주님이 제자들을 파견하며 하신 말씀(마태 10, 7~14)을 자신에게 한 말로 이해하고 거기서 자기 사명을 발견했다. 그것은 곧 주님의 발자취를 글자 그대로 따르는 것이었다. 이래 그것은 그의 일생의 프로그램이 되었다. 프란치스꼬는 1209(1210?)년 그의 주위에 모여든「작은형제들」과 같이 로마로 교황 인노첸시오 3세를 방문하고 교황으로부터 구두로 설교할 허가를 얻었다. (교황의 정식 인가는 1223년). 이리하여 프란치스꼬회가 탄생했다. 너도 나도 그의 가난의 외침에 응했고 미구에 그 수가 5천명에 달했다. 그리고 그의 생전에 벌써 프란치스꼬회는 전 서구에 전파되었다. 프란치스꼬는 생전에 또 성녀 글라라를 통해 제2회, 즉 여자수도회(글라라회)를 세웠고 평신도를 위한 제3회도 세웠다.
프란치스꼬는 그간 이집트로 가서 회교도의 개종을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와 알베르노산에 은신했다.
여기서 그는 주님의 거룩한 상처(오상)를 직접 자기 몸에 받았다. 다음 이로 인한 고통과 중병가운데 창조주를 찬미하는 유명한「태양의 노래」를 지었다. 그리고 아씨시로 돌아와 거기서 가난하고 헐벗은채 사망했다.
프란치스꼬는 그의 단순하고 순진함, 그리스도에 대한 열렬한 사랑과 겸손 등으로 인해 중세에서 가장 인기있고 가장 사랑받는 성인이 되었다. 그는 오늘날에도 비단 가톨릭만이 아니고 비가톨릭으로부터도 존경을 받고 있다.
도미니꼬회의 창립자인 도미니꼬(약1170~1221)는 스페인에서 태어나 사제가 되고 수도 참사회원이 되었다. 1206년 로마로 여행하던중 남부 프랑스 알비에서 알비파를 알게 되고 그들을 개종시키기 위해서는 설교가 필요함을 절감했다. 그래서 그는 그 부근에 설교 중심지를 세웠다. 이것이 도미니꼬회의 기원인「설교 수도회」였다. 1216년 교황의 인가를 받았다. 처음에는 아우구스티노회칙을 따랐으나 곧 청빈회칙을 채택함으로써 프란치스꼬회에 이어 제2의 탁발 수도회가 되었다. 설교를 최상의 과제로 삼았으므로 자연 학문과 연구에 치중하게 되었다.
탁발수도회는 청빈 정신과 내적신심으로 13세기의 종교생활과 교회생활에 새로움과 신선함을 불어넣었다. 특히 프란치스꼬회와 도미니꼬회는 보나벤투라, 알베르토,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대학자를 배출함으로써 교회 학문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또 포교수도회로서 이슬람 세계와 멀리 동양에서까지 선교사를 파견함으로써 포교에도 기여했다. 무엇보다도 프란치스꼬회는중국에 선교사를 파견했다는 점에서 우리의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되고 있다.
몽고의 징기스칸은 몽고를 통일, 대몽고국을 새우고는 13세기 중엽, 유럽까지 침략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유럽에서는 몽고의 포교를 시도하게 되었다. 교황 인노첸시오4세는 1246년 이태리 프란치스꼬회원 카르피네를 카라코룸(오늘의 북경)으로 파견했다. 이어 프랑스왕 루이 9세는 루브루크를 파견했다(1253). 그는 귀국후 유명한 여행기를 남겼다.
니콜라오 4세 교황은 몬테코르비노를 북경으로 보냈다. 이때는 이미 몽고가 그 국호를 원(元)으로 개칭하고 북경으로 천도한 후였다. 코르비노는 1294년에 북경에 도착, 향후 30여년간 북경에 체류하면서 수만명을 개종시키고, 성당을 건립하고 3개의 교구를 만드는 큰 성과를 올렸다. 1307년에는 스스로 북경 대주교가 되었다.
그후에도 로마에서는 계속해서 주교와 신부들을 파견했다. 그러나 1368년 명(明)나라에 의해 원나라가 망하고 몽고인들이 모두 북방으로 쫓겨났다. 이렇게 원나라가 멸망하자 그리스도교도 그 전에 있었던 경고(景敎, 네스토리우스파)와 함께 몽고인과 운명을 같이 하면서 중국 땅에서 소멸되고 말았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