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의 중심이 수도원에서 13세기에 새로 나타나는 대학으로 옮겨져 거기서 학문, 특히 철학과 신학이 전성기를 맞게 된다. 대학의 출현은 교육에 혁명을 초래했다. 이제 학위를 가진 사람이 귀족의 대우를 받게 되었고 이리하여 학문이 성권(聖權)과 제권(帝權)에 이어 제3의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대학은 정확히 말해서 창립된 것이 아니고 기존의 유명한 교회 학교들이 대학으로 발전한 것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대학이 생길 때까지 학문의 중심은 주교좌성당이나 수도원에 부설된 학교였다. 예컨대 파리에도 물론 주교좌 부설 신학원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쇠퇴하자 서로 다투어 신학원을 세웠다. 그중 하나가 소르본느였는데 그것이 후에 전 파리대학의 명칭이 되었다.
그런데 이런 학교들이 많은 파리나 볼로냐 같은 도시 학교에 13세기가 되면서「교사 및 학생단」(Universitas Magistrorum et Scho-larium)이란 단체가 조직되었다.
이 단체는 교회와 국가의 승인을 얻고 교황으로부터 특권을 부여 받고 주교로부터도 독립되었다. 이것이 원형이 되어 13세기 초엽이래 대학이 탄생하게 되었다. 파리, 볼로냐, 옥스포드 등이 이 무렵의 주요한 대학이었고 그중에서도 파리대학은「모든 학문의 어머니」로 불릴만큼 제일 명성이 높았다. 14세기초 대학수가 이미 29교였는데 독일은 제일 늦게 14세기 중엽에 가서야 대학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교육년한은 4년, 먼저 일반 교양과목을 배우고나서 철학, 신학, 법학, 의학중 한 과목을 선택하게 되어 있었다. 종전의 수도원이나 주교좌 성당 학교들이「특수학교」로 불린 것과는 대조적으로「종합학교」로 불렸다. 그것은 대학에서 모든 과목을 가르쳤기 때문이 아니라 전 서구에서 모든 교수와 학생을 차별없이 받아들이고 또 어느 대학의 학위이든 서구 전체에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각 대학의 특징은 있었다. 파리 대학은 신학과 철학으로 유명했고, 볼로냐는 법학으로, 살레르노는 의학으로 유명했다.
■ 스콜라학의 전성
스콜라학이란 중세의 철학과 신학을 말한다. 아니 철학이나 신학자체라기 보다는 그것을 연구하는 방법을 말한다. 즉 이성(理性)을 종교진리에 적용하여 그것을 설명하고 체계화하고 또 이성의 이름으로 제기되는 반대를 해결하려는 하나의 학문적 방법이다. 스콜라학은 13세기 이르러 극성하고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러 완성되지만 그러나 실은 그것이 지난 몇세기간의 노력의 결실이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스콜라학의 시조(始祖)로 불리는 안셀모(+1109)가 나오기까지의 신학 연구방법은 오로지 성서와 교부의 권위에만 의존하는 이른바「교부적 방법」이었다. 그런데 캔터베리의 대주교였던 안셀모는 여기에 이성의 인식이란 새로운 논증을 첨가했다. 즉 이성의 힘으로 신의 인식이 가능하고 따라서 신앙이 이성에 근거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안셀모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알기 위해 믿는다」(Credout intelligam) 그리고「믿기 위해 알고자 한다」(Interlligo ut cre-dam). 전자는 그전까지의 방법을 말하고 후자는 자기가 주장한 학문적 방법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 스콜라학이 쇠퇴하면서「나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Credo quia abaurdum)는 말이 나왔다.
여기서 스콜라학 전성기의 신앙과 이성(학문)의 조화가 깨지기 시작한다.
11세기의 안셀모에 이어 12세기에 와서는 베드로 아벨라르와 베드로 롬발두스 등이 신앙 문제에서 이성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스콜라학을 발전시켰다. 이어 13세기에 스콜라학이 전성기에 이르게 되는데 거기에는 주로 두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십자군을 통해 희랍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가 유럽에 소개되면서 그 철학적방법이 그리스도교 신학에 적용된 때문이고 또 하나는 때마침 도미니꼬회와 프란치스꼬회에서 알베르토와 토마스 아퀴나스, 보나벤투라와둔스 스코투스 등 큰 학자들을 잇달아 배출했기 때문이다.
알베르토(약1200-1280)는 대(大)란 존칭외에 두루 박식했으므로「전과박사」로도 불린다. 그는 독일의 귀족 집안에 태어나 도미니꼬회에 입회, 필른과 파리에서 교수생활을 했고, 파리에서 아퀴나스를 알게 되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깊이 연구하고 그 철학적 방법을 신학에 체계적으로 적용한 최초의 학자이다. 그러나 이 분야에서 곧 그의 제자 아퀴나스가 그를 능가하게 된다.
토마스 아퀴나스(약1225-1274)는 남부 이태리의 귀족 출신으로 도미니꼬회에 들어갔다. 그는 나폴리, 쾰른, 파리등지에서 수학했고 또 파리와 로마 등 여러곳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는 알베르토의 제자로서 그의 방법을 완성했다. 즉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가톨릭 진리에 적용시켜 가톨릭철학과 신학의 종합을 이루었다. 이렇게 그의 시대의 신학을 집대성한 것이「신학 대전」(神學大典)이고 호교론을 종합한 것이「호교대전」이다. 무엇보다도 「신학대전」은 무적(無敵)의 저술이며 현재까지 기본적인 신학 교과서 구실을 하고있는 고전이기도 하다. 그는 아우구스티노 이래 가장 천재적인 신학자이다. 동시에 그는 시인이요 위대한 신비학자요 성인이었다. 그는 성체축일의 성무일도를 작성했는데 그 중에서「라우다 시온」(시온아, 구세주를 찬미하라)이란 성체찬가는 아직도 널리 애창되고 있다. 「천사적 박사」로 불려 마땅하다.
보나벤투라(1221-1274)는 프란치스꼬회의 총장과 추기경을 지낸 위인인 동시에 일류 석학이었다. 그도 아퀴나스처럼 파리에서 배우고 파리에서 가르쳤다. 그러나 그의 신학은 플라톤적이고 아우구스티누스적이었으므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아퀴나스와 크게 달랐다. 그는 토마스의 이성과 인식대신에 오히려 의지와 사랑을 강조했다. 그가「세라핌적 박사」로 불리게 된 것이 아마 이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둔스 스코투스(약1265-1308)는 영국에서 태어나 파리와 쾰른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고, 쾰른에서 사망했다. 그는「예리한 학자」로 불릴만큼 예민하고 비판적이었다. 그는 보나벤투라의 노선을 따라 의지와 사랑의 우의를 주장하는 스코티즘이란 프란치스꼬회 학파를 발족시킴으로써 토미즘의 도미니꼬회 학파와 대립하게 되었다. 이 대립은 14세기에 더욱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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