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평범한 버릇이 한가지 있습니다. 누가 면회를 왔다면 꼭 누가 왔는지 물어봅니다. 그리고 전화가 왔다고해도 반드시 누구한테서 왔는지 물어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면회 온 사람을 그냥 돌려 보내거나 전화가 온 경우 거절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면서도 반드시 누군가를 물어보는 이유는 그냥 버릇이라고 해둡시다.
대개는 누가 왔다면 무엇때문에 왔는지 압니다. 그래서 미리 대답을 준비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그러나 왜 나를 찾는지 모르는 경우에는 불안합니다. 더구나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이 나를 찾을 경우에는 대단히 궁금해하면서 막상 만나면 경계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어떤 때에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나를 만나려 할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에는 미리 빨리 돌려 보낼 궁리를 하면서 만납시다.
대체로 내가 만나고 싶지않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해봤습니다. 한마디로 만난 다음 손해본 느낌이 드는 사람입니다. 손해라고 해야 물질적 손해는 아니고, 시간적인 손해이며 나아가 육체적, 심적 손해입니다. 만난 다음 아주 피곤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라도 가벼우면 별 문제이지만 마음까지 무거울 때에는 톡톡히 손해본 느낌입니다. 한번 그런 일이 있으면 그 다음에는 만나기가 두렵습니다. 그사람이 다시 만나러 왔다면 불안합니다. 이 불안한 느낌은 전에 투자한 만큼 성과가 없었으므로 손해를 봤기때문에 지금 느끼는 불안한 느낌입니다.
어느 한편이 손해를 본다는 것은 정의가 실현 되지않은 것을 의미 합니다. 정의는「각자의 것을 각자에게 돌려 주는 것」입니다. 어느 한편이 자기의 것을 돌려 받지 못했으면 정의가 실현되지 못한 것입니다. 정의가 없는 곳에는 평화가 없으며 그때 느끼는 느낌이 불안 입니다. 즉 안정이 없음을 말합니다.
정의가 실현되는 곳에 안정이 있습니다. 마음의 안정뿐 아니라 정치안정, 경제안정, 사회안정, 모든 안정이 정의의 실천 없이는 불가능한것입니다. 세상의 이치가 그런데도 자기 이익만을 챙기는, 곧 다른 사람에게는 손해를 보이면서 제반 안정을 외치는 사람들을 보면 그저실소밖에 나오는 것이 없습니다.
요즘 각 분야에서 안정 얘기가 많이 나오는 것을 보면 모든 분야가 불안하고 따라서 모든 분야에서 정의가 실현 되지 않고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정의가 실현 되는 곳에 평화가 있습니다. 이는 개인 간에도 그렇고 정당 간에도, 노사 간에도, 국가 간에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 손해보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싸움도 전쟁도 생깁니다.
오늘 복음 성서에서 예수님이 하신『내가 주려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르다』(요한14, 27)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를 생각해 봤습니다. 정의가 실현됨으로 얻게 되는 평화가 아니라면 무슨 평화일까…?
분명히 손해를 보고도 불안하거나 손해본 느낌이 들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진정한 선물은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즐겁습니다. 받는 사람은 이득을 봐서 즐겁다 치더라도 주는 사람도 전혀손해본 느낌이 없이 즐겁기만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시간을 투자했다고 해서 그 시간이 아까운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오래 함께 있었지만 더 오래 함께 있고 싶을 것입니다. 가진 것 무엇이나 주어도 아깝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판국에 손해본 느낌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는 정의를 무시한 처사가 아니라 뛰어 넘은 더높은 차원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마음의 안정뿐 아니라 기쁨을 동반 합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손해보고 들어 갑니다. 그 손해를 손해로 받아들이지 않고 보람으로 받아들이기에 기쁨니다. 남을 위해 봉사하는 모든이들은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 한 결코 지속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자기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편안 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려고 한 평화는 사랑함으로 얻게되는 평화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는 일이 결코 즐겁지 만은 않습니다. 내게로 돌아 오는 것은 아픔이고 고통이기때문입니다. 하지만 기쁘게 그 희생을 받아들이기로 자발적으로 결심하고 또 기쁘게 실행에 옮길 때 우리 마음은 평화를 누리고 남 모르는 기쁨을 깊이 간직 합니다. 이 기쁨은 자발적인 희생일 경우에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가끔 정의를 실천하지 않으면서 희생을 강요하고 그것이 사랑의 실천임을 내 세울때, 희생을 강요 당한 사람들은 분노 합니다. 자발적이 아닌 희생은 억압일 따름입니다.
해마다 5월에는 이런 이유로 생각나는 사건들이 많습니다. 사랑으로 희생을 치루고 얻는 평화와 기쁨은 강요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정의는 평화를 가져다 주고 사랑은 평화와 아울러 기쁨을 안겨 줍니다. 그리스도가우리게 주려는 평화는 선물로 주는 은총이며 세상의 정의를 뛰어 넘은 사랑의 결실로 주려는 평화이기에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른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그리스도가 주는 평화를 누리는 때이며 나아가 우리가 누리는 평화를 세상에 전해야 하는때 입니다. 나도「내가 가지지 않은 것을 남에게 줄 수 없으니」지금부터 시간이 될때까지 한가로운 평화 가운데기쁨을 좀 누리겠습니다….
우선 담배부터 한대 붙여 물고 부활때 그리고 어버이 날에 받은 선물과 편지들을 하나씩 기억해냅니다. 그리고 담배 한모금 깊이 빨아 내뿜는 연기 저편으로 내게 선물과 사랑의 편지를 보낸 한분 한분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받고있는 사랑으로 얻게 된「평화」와「기쁨」에 잠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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