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신도의 종교ㆍ신심 생활
전성기의 중세교회사에서 마지막으로 종교와 신앙생활, 종교와 교회 예술에서 어떠한 변화와 발전이 있었는가를 살펴볼까 한다.
이 시기의 특징으로 무엇보다도 평신도의 종교생활과 신심활동이 활발해지고 풍부해졌음을 들수 있다. 그러나 특히 평신도의 청빈운동 같은 것은 성직자들이 돌보지 않았기때문에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두지못할 뿐더러 도리어 활로를 찾아려다가 오류에 빠지기도 했다 (특히 발도파).
이러한 상황에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의 등장과 탁발수도회의 탄생은 참으로 섭리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탁발 수도자들은 평신도의 새로운 종교적 요구에 생활과 모범으로 진지하게 응했고 뿐만 아니라 그들의 평범하고 대중적인 설교는 평신도들의 신앙심을 더없이 열렬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같은 배경에서 우리는 왜 탁발수도회의 제3회가 창립되고 또 그렇게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는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제3회는 세속에 있으면서 수도생활을 열망하는 평신도의 요구에 응한 것이었다. 남녀노소할 것 없이 무수한 사람들이 이 3회에 가입했으며 그중에는 프랑스의 성 루이 9세, 헝가리의 성 엘리사벳과 같은 저명한 인물들도 있었다. 그밖에 매괴(로사리오)회, 성의회 등 새로운 평신도 신심단체가 생긴것 역시 이 시기의 일이었다.
12세기는 「성모 신심의 세기」 로 불릴 만큼 성모공경이 성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안셀모, 베르나르도, 도미니꼬, 보나벤뚜라 같은 성인들의 성모에 관한 설교와 저술에 힘입은 것이었다. 박해시대때 우리 신앙선조들이 즐겨 바치던 「성모께 바라는 경」 (생각하소서, Memorare)은 바로 베르나르도 성인이 지은 것이다. 또한 성모축일이 많아지고 특히 「주의 기도」와 「사도신경」에 이어 「성모송」 이 시작되었다.
거듭된 십자군의 원정으로 구세주의 고난과 그의 거룩한 상처(5상)에 대한 신심, 그리고 순례와 유해공경이 유례없이 성해졌다. 예수의 고난에 대한 신심의 특별형식으로 성로신공(십자가의 길)이 행해지기 시작했다. 유해공경이 성행하게된 것은 십자군을 계기로 팔레스티나 성지로부터 많은 유물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나친 유해공경은 동시에 가짜 유물을 많이 낳게 했다.
13세기는「성체신심의 세기」로 불릴 정도로 이 신심에 큰 변화를 초래했다. 성체가 지날때 종을 치고 신자들이 무릎을 끓어야 하는 등 너무 엄격해지자 도리어 성체를 멀리하고 영세체를 드물게 하는 경향이 생겼다. 이에 성체신심을 앙양시키기 위한 조처로, 미사때 거양성체가 도입되고, 성체를 성광(聖光)에 모셔 현시를 하게 되고, 적어도 일년에 한번 부활절에 고해와 영성체를 할 것이 의무화되고 (1215, 4차 라테란 공의회) 또 성체축일 전교회의 축일로 격상되었다(1264). 그리고 성체성사를 포함해 그 수가 비로소 7성사로 확정되었다.
■ 로마네스크와 고딕 예술
중세 초기의 교회건축은 아직 고실리카 양식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점차 로마네스크란 고유한 건축양식이 발전되어 11세기 초부터 12세기(곳에 따라서는 13세기)까지 서구 유럽에서 군림하게 되었다. 클뤼니 수도원들이 그들의 유명한 성당들을 이 양식으로 지었고, 이어 시토회원들이 그것을 크게 보급시켰다. 라틴 십자형의 성당, 지하성당, 다양한 장식, 견고함 등이 그 주요 특징이다. 몇개의 파가 있었지만 어쨌든 대표적인 것으로 투르의 성 마르티노성당, 마리아 라흐의 수도원 성당, 앙굴램, 힐데스하임의 대성당 등이 있다.
고딕은 로마네스크에서 유기적으로 성장한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움이있다. 고딕이란 원래 고트족을 의미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고딕이란 말은 그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고, 르네상스 시대에 와서 소위 지성인들이 그 위대한 예술에 정당한 평가를 못내리고 고대 희랍ㆍ로마만을 예찬한 나머지 중세를 경멸하는 뜻에서 만들어낸 말이다.
고딕은 북부 프랑스 일ㆍ드ㆍ프랑스에서 12세기초에 발생했다. 그곳의 생ㆍ드니 수도원 부속 성당이 최초의 고딕 성당이 되었다. 여기서 각 지방에 적응하면서 스페인, 독일, 영국, 이태리 등 전 서구로 번졌다. 12~13세기 전성기, 다시 말해서 순수 고딕시대의 걸작으로, 위의 생ㆍ드니 외에 파리의 생ㆍ샤펠과 노트르담, 샤르트르상스, 라옹, 루앙, 아미앙, 랭스, 시에나, 쾰른, 바르셀로나 등의 대성당, 비인의 스테파노 성당을 꼽을수 있다. 영국과 독일 같은 데스는 14세기, 심지어는 16세기까지 고딕이 지배했다. 이것을 후기 고딕이라고 하는데, 고딕의 순수성을 잃고 오히려 복잡해졌다. 그러나 벽돌이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수도자들 대신 평신도 건축가와 조각가들이 처음으로 건축에 참여하게 되었다.
로마네스크와 비교할 때 전반적으로 고딕이 그 장식에 있어서 더우미하고 또 훨씬 인간미가 있으며 구조에 있어서 청순하고 웅대해졌다. 구체적으로는 보다 다이나믹해진 궁륭과 지주(支柱)들, 높은 창, 호화스러운 스테인드 글라스, 많은 장미창, 성당 안팎의 다양하고 풍부한 조각 등등이 그주요 특징을 이루고 있다.
예술은 그 시대의 문화를 표현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중세 예술이 종교 예술이 될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극히 당연하고, 또 그런 의미에서 그것이 고딕 성당건축에서 가장 완전히 구현되기에 이른 것 역시 당연하다고 할수 있다. 따라서 고딕 예술에서 13세기의 대중적인 신심, 천상세계를 향한 동경, 질서와 조화, 평화와 종합 등의 경향이 함께 표현되기에 이르렀다.
실제로 소란한 도시 한가운데 하늘 높이 우뚝 솟은 종탑은 오로지 높은 곳을 동경하고 그곳의 평화만을 희구하고 있는 인상을 준다. 또한 학문의 종합이 토마스의「신학대전」에서 실현되었다면 예술의 종합은 다름아닌 고딕이었음을 그 조화와 질서에서 알수있다.
오늘날 고딕은 모든 시대를 통한 최대의 예술적 창조의 하나인 동시에 시대를 초월하여 가톨릭정신을 완전히 구현한 예술도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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