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한반도 분단, 이제는 평화체제로’ 주제로 열린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심포지엄 토론회에서 임을출 교수(맨 왼쪽)가 의견을 말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함에 따라 남북관계에 긍정적인 변화조짐이 보이는 가운데 한국교회가 한반도 평화체제를 논의하는 심포지엄을 마련했다. 한국교회 차원에서 처음으로 한반도 평화체제를 공개적, 공식적으로 논의한 자리였다. 이 자리를 통해 한반도의 경직된 관계를 풀어나갈 수 있는 열쇠는 ‘지속적인 교류’와 ‘북한체제에 대한 존중’이라는 점을 확인하고 앞으로 남북관계의 방향성을 모색했다. 심포지엄은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위원장 이기헌 주교)가 6월 1일 오후 의정부교구 일산성당에서 ‘한반도 분단, 이제는 평화체제로’를 주제로 2017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달을 기념해 열었다.
■ 평화체제, 북한 존중과 이해를 기반으로
이기헌 주교(의정부교구장)의 기조강연으로 시작한 심포지엄은 김학재 교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가 첫 번째 발제를 맡았고 임을출(베드로·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가 발제를 이어갔다.
‘한반도 평화체제를 위한 한국 가톨릭교회의 역할’을 발제한 임 교수는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쳐 오며 남북 간 인적·물적 교류가 단절되고 개성공단까지 폐쇄돼 현재 남북관계는 매우 경직돼 있다”고 진단했다. 임 교수는 이러한 긴장관계를 해결하고 평화체제로 향하기 위해서는 북에 대한 강경한 제재와 압박보다는 존중과 이해를 기반으로 한 신뢰 구축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그는 “일각에서는 김정은 체제의 불안정성과 붕괴가능성을 거론하며 북한을 더욱 압박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북한과의 관계가 단절될수록 북핵과 인권 문제의 악화로 귀결된다”고 강조했다. 이어 “남북관계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인정하는 자세로 북한이 왜 핵과 미사일에 집착하는지, 그 행위가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합리적으로 고민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유엔 안보리 결의도 대북제재와 함께 대화를 통한 북핵 문제의 해결을 촉구하고 있어 북한을 자극하는 한미연합 군사훈련 형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며 남북관계의 긴장을 풀기 위한 방향성을 제시했다. 남북 분단과 군사적 긴장 고조로 인해 국민들의 세금 수십 조가 무기 수입과 개발에 쓰이고 있는 현실도 거론하며 남북 평화체제에서는 막대한 안보유지 비용을 청년 취업 문제와 양극화 해소, 사회복지 사업에 투입할 수 있다는 점도 상기시켰다.
임 교수는 북한과의 교류·협력에 대해 인도적 차원의 사회문화 교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교류협력에 따른 수혜자가 북한 주민이 되도록 설계하면 당장 북한의 핵보유 의지를 꺾을 수는 없겠지만 북한 내부 변화를 야기하는 동력을 만들어내는 데는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중단된 개성공단과 관련해 “개성공단 재가동은 경제적 가치 외에도 건설적인 통일모델과 안보의 방파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개성공단 재가동을 위해서는 먼저 ‘북핵 문제로 인한 불확실성’을 해결해야 한다고 밝혔다.
임 교수는 “가톨릭교회는 남북 평화체제 정착을 위해 생명과 평화, 상생을 추구하는 활동을 어떤 상황에서도 지속해야 할 것”이라며 “평화 지향적인 가톨릭 고유의 장점을 살려 남북 갈등 상황을 대화와 협상으로 이끌어가는 여론을 조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 독일 통일에서 모범 찾아야
발제 ‘평화체제로 가야 하는 한반도’를 맡은 김학재 교수도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는 ‘연대로서의 평화’가 필수적이라고 역설했다. 동독과 서독이 통일 전부터 연대를 이룬 독일 통일을 모범 삼아 한반도 역시 남북 간에 지속적이고 자유로운 교류협력을 이룰 때 평화체제로 나아갈 수 있다는 주장이다.
김 교수는 한반도가 ‘평화체제’로 전환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적극적 평화안보 구축’을 제시했다. 적극적 평화안보 구축의 3단계 로드맵은 ▲2~3년간 북핵 완전동결 목적으로 남북 긴장완화, 교류협력, 평화협정 논의 시작 ▲5년간 비핵화를 위한 다자외교, 교류협력 확대 ▲5년간 한반도 비핵화, 동북아 군축 논의와 남북 평화체제를 위한 동북아평화협정 순으로 구상했다. 김 교수는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북한과의 교류협력을 꾸준히 이끌어 갈 때 분단과 위협적인 정전체제를 극복하고 평화체제로 나아갈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이날 심포지엄 토론에서도 이목을 끄는 주장들이 나왔다. 백장현(대건 안드레아·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연구위원) 박사는 “남북이 분단 이후 맺은 각종 합의는 문구만 보면 완벽해 보이지만 현재는 모든 합의가 사실상 무효화됐다”며 “중요한 것은 합의문서가 아니고 합의를 지키겠다는 의지와 상호 신뢰”라고 말했다. 백 박사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 당하며 조기에 물러난 것은 한반도 안보에는 오히려 긍정적인 환경을 만들었다고 평가하며 “지금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은 북핵문제와 맞물려 있어 6자회담을 활용해 북핵문제를 먼저 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백 박사는 북핵 해결 수순으로 ‘6자회담 개시→남북미 ‘종전 선언’→남북 정상회담 정례화(사실상의 남북 연합)→평화협정 체결→북핵 폐기와 북미·북일 수교 동시 이행→한반도 냉전 종식’을 제시했다. 그는 한반도 냉전 해소에서 핵심 요소인 북미관계 정상화에 가톨릭교회와 프란치스코 교황의 역할론도 내놨다. 적대 관계였던 미국과 쿠바가 2014년 관계 정상화를 이루는데 교황의 중재가 결정적으로 기여한 사실을 근거로 들었다. 백 박사는 미국 전체 인구의 22% 이상을 차지하는 가톨릭 신자들이 교황의 평화 메시지에 호응해 북미 수교와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지향하는 미국 내 여론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내다봤다.
이기헌 주교(앞줄 맨 왼쪽)가 심포지엄 발제를 듣고 있다.
■ 한·중·일 주교 교류모임으로 확대 필요
맹제영 신부(의정부교구 민족화해센터 협력사제)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가톨릭교회의 역할을 구체화했다. 맹 신부는 2015년 12월 주교회의 민족화해주교특별위원회 소속 주교단이 방북해 북한의 가톨릭신자들과 공개적으로 연대를 이룬 일을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하며 한국과 일본, 중국 교회가 연대를 이루고 교황청과 북한이 수교를 맺는데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요청했다.
그는 “한국과 일본 교회 주교단이 매년 한·일 주교 교류모임을 가지면서 양국 사이의 이해를 높이고 여러 현안도 공유하고 있는데 중국이 북한에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음을 감안해 ‘한·중·일 주교 교류모임’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남한은 지정학적으로 혼자 힘으로는 남북관계를 개선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어 동북아시아 천주교회 연대가 국가 간 연대와 민관협력체계를 이끌어내는 마중물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와 함께 “교황청과 북한이 수교를 맺으면 남북 긴장을 완화하고 평화체제로 가는 길이 될 수 있다”며 “교황청과 중국의 수교 문제는 중국교회가 독자적인 주교 임명권을 요구해 쉽게 해결될 것 같지 않은 반면 교황청과 북한 수교는 북한 내 상주 사제 문제만 합의되면 되기 때문에 쉽게 추진될 가능성이 있다”고 예측했다.
독일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2학년 때 한국에 온 서한나(요안나·의정부교구 고양 정발산본당)씨는 통일된 독일에 대한 인상을 들려준 뒤 “한국사회 청년들이 입시전쟁과 취업전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인식에서 벗어나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찾고 북한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기헌 주교는 심포지엄을 마무리하면서 “성 요한 23세 교황의 회칙 「지상의 평화」에 나오듯 연대를 통해 서로를 존중하고 다름 안에서 일치를 향하도록 해야 한다”며 앞으로도 교회가 평화로운 남북관계 회복에 역할을 다할 것을 다짐했다.
박지순 기자 beatles@catimes.kr
권세희 기자 se2@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