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서 모스크바 일정 안내를 맡은 권마리아씨의 러시아 이름은 권 리디야 알렉산드로프나이다. 1945년생 해방동이인 그녀는 카자흐스탄에서 출생했다. 일제시대인 1937년 시베리아 개척을 위해 러시아 하바로프스코로 강제 이주당했던 그녀의 부모는 어느날 갑자기 시베리아 횡단철도에 실려 카자흐스탄으로 끌려갔다. 영문도 모른 채…. 그들은 수많은 여타의 한국인들과 그 운명을 함께 한 숙명의 고려인들이었다.
철권정치 공포정치가 극을 달리던 스탈린시대, 러시아의 고려인들은 나라를 잃은 설음에 이어 동강 난 조국의 뼈 아픈 현실을 삶 속에서 경험해야 했던 사람들이었다. 사막을 일구어 옥토를 만들었던 하바로프스크에서 원동으로 불리우는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으로 강제이주 당했던 사람들. 그 한 많은 러시아의 고려인들은 또다시 광활한 대지를 옥토로 변화시키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뼈 아픈 조국의 분단
진정 그들은 기적을 만들어낸 사람들이었다. 잠자리에 쫓기듯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야 했던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그들은 이삿짐 속에 볍씨를 가져와 메마른 대지에 뿌렸고 그 볍씨는 황막한 중앙아시아 대륙을 황금 물결의 옥토로 바꾸었던 것이다.
러시아의 권마리아씨는 강인한 고려인의 기질을 그대로 물려받은 어쩔수 없는 러시아의 고려인 2세였다. 강제이주 당한 카자흐스탄에서 고등학교를 1등으로 졸업한 그녀는 모스크바공대로 유학, 물리학과와 철도대학에서 자동화 관련 최첨단 과학을 공부한 수재였다. 기초물리학, 전자부품 제조학 등을 섭렵한 그녀는 당연히 모스크바 유수의 회사에서 중간 간부로까지 승진하는 등 잘 나가는 고려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잘 나가던 그녀의 앞길은 러시아의 개방과 개혁정책으로 막히기 시작했다. 고르비의 몇 번의 서방 나들이와 더불어 시작된 러시아의 개혁 개방은 세상을 향해 막혀 있던 출구를 뚫기 시작한 반면 고려인들의 앞길은 상대적으로 막아 버렸다. 갑작스런 개혁 개방이 몰고 온 혼란과 휴유증으로 파생한 경제적 몰락은 탄탄하기만 했던 이들의 밥줄을 제일 쉽게 끊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앞길 막힌 고려인들
다민족 국가에서 민족성을 잃지 않고 당당히 살아나가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교육이라며 시켰던 러시아 고려인들의 드높은 교육열은 90%를 웃도는 대학 입학률이 말해주고 있다. 각종 통계에서 가장 높은 것으로 집계된 고려인들의 지식 수준을 토대로 의사 과학자 철학자 교수 등을 비롯 각종 직장 내에서 비교적 높은 위치를 차지했던 이들 수많은 인재들은 하루 아침에 갈 곳 없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물론 60~70년대를 풍미했던 이 같은 교육은 80년대 들어 시들기 시작했다고 마리아씨는 들려주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직장 내에서 아무리 유능해도 승진하는 데 뚜렷한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최첨단 과학을 공부한 여성 과학도로서 남성들과 당당히 어깨를 겨루었던 수재, 권 마리아씨도 자민족 우선주의 정책에 따라 러시아인들에게 자리를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결국 개방과 개혁이 탄탄하던 그녀의 앞길을 가로막아 버린 셈이 된 것이다.
그러나 잠자리와 빵 등을 모두 보장 받고 일자리도 있었던 그 시대였지만 마음 속에에는 항상 두려움이 있었다고 권 마리아씨는 고백했다. 이제 그녀는 이 같은 두려움으로부터 더 이상 시달리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생계를 보장 받는 뚜렷한 직장도 없고 매일의 양식도 걱정해야 하는 고달픈 생활이지만 그녀는 분명 자유의 냄새를 느끼고 있다고 확신했다.
인간의 기본적인 자유가 더 중요하고 가치가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그녀의 주장은 현재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는 러시아 경제, 그 현실에서 보면 설득력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실제로 러시아 일각에서는 과거로의 회귀라는 강력한 유혹을 받고 있고 그 세가 확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빵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목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는 그 절박한 현실을 우리는 빵을 사기 위해 많은 시간을 소비함으로써 체감할 수가 있었다.
러시아 최고 지성인 중의 한 사람인 권 마리아씨가 겪고 있는 현실은 역시 최고의 지성인으로 분류될 수 있는 그녀의 친구 김 라리싸씨를 통해 더욱 분명하게 읽을 수 있었다. 모스크바 외곽지대 아파트에서 남편 아들과 함께 사는 김 라리싸씨는 현재 모스크바에 진출, 활동하고 있는 개신교 목사의「개인 통역」일을 맡고 있었다.
◆빵을 갈구하는 사회
모스크바대학을 졸업한 유능한 과학도인 그녀가「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직장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완전히 타의에 의한 것이었다. 구 소련시대, 「너무 튀지 않고 또 처지지도 않도록」지혜롭게 살아남은 그들이지만 이제 수십여 소수민족 가운데 별볼일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있음이 확연했다.
모스크바의 「다민족학교」는 소수민족 중심으로 쪼개진 구 소련의 현주소를 그대로 담고 있다. 다민족학교는 24개 민족의 어린이들이 24개 반으로 나뉘어 자국어를 중심으로 공부하는 러시아 첫 다민족 교육기관. 비록 주말학교로 운영되고 있지만 이곳에서 우리의 고려족 어린이 15명이 열심히 낯선 언어, 한국말을 배우고 있다.
권 마리아씨는 바로 그들의 스승「한국말 선생님」이다.
◆별볼일 없는 존재들
그녀는 기초적인 한국말도 제대로 못했던 자신을 선생이라는 자리까지 오르게 한 공로자는 다름 아닌 북한 사람이었다고 밝혔다. 다음은 그녀가 밝힌 조선말 공부의 배경.
90년 길에서 만난 한 조선 사람이 조선말로 그녀에게「굼」백화점(모스크바 최대 국영 백화점) 가는 길을 물었다.
그녀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한 민족인 자신이 말을 몰라 길을 가르쳐 줄 수 없었던 그녀의 마음은 너무나 아팠다. 그 길로 그녀는 국립한글학원을 찾았고 3년간 열심히 모국어를 공부한 끝에 고려족 어린이들의 한국말 스승이 된 것이다. 강인하고 적극적인 그녀의 이 선택은 가톨릭교회를 스스로 찾는 일에도 적용됐으며 그녀는「권 마리아」로 거듭 태어날 수가 있었다.
현재 모스크바에서 살고 있는 고려인은 약 6천 명 정도. 50만을 헤아리는 전체 수치로 보면 적은 인원이지만 격동하는 러시아 중심부에서 한국의 핏줄로 살아야 하는 이들의 현실문제는 결코 간과할 수가 없다.
그들에게 그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하고 우리는 그들에겐 그 누군가가 되어야 할 충분하고도 필요한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전체 고려인 50만명
러시아 방문 기간 중 우리는 시간이 허락하는 한 보다 많은 고려인 가정을 방문하려고 노력했다. 노력한 만큼 우리는 고려인 가정들을 방문했고 그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진솔한 대화를 통해 우리는「한국」도 「조선」도 아닌「고려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처지를 이해할 수가 있었다.
1세기에 가까운 단절로 인해 그들과 우리는 하나의 민족으로서 필요한 동질감들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작은 만남들을 통해 그들과 새로운 만남의 장을 열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확실한 결론으로 얻어냈다.
어설픈 모국어이지만 용감하게 우리의 아이들에게 모국어를 가르치고자 애쓰는 권 마리아씨. 그녀와의 만남은 새로운 만남의 길을 열기 위한 작은 시작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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