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세말기의 일반적 특징
중세 말기는 중세의 그리스도교적 국제사회가 해체되는 시기이다. 그것은 그간 사상과 신앙, 도덕과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서구의 그리스도교 국가들을 결속시켜 함께 십자군까지 일으킬 수 있었던 보편주의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물론 중세적 통일의 화해란 위험한 경향은 이미 중세전성기에 나타나기 시작했었다. 그러나 그 분열이 이 시기에 더욱 확대되면서 심지어 반교황 운동으로 전개되기에 이른다.
정치면에서는 국가의식이 각성되고 근대국가가 형성되면서 특히 프랑스와 영국 같은 신흥 국가들이 이기적이고 국가주의적인 정치이념에서 교황의 정치 권력에서 독립된 자주국가의 이념을 추구하게 된다.
이에 교황들은 교황권을 지배하려는 강력한 국가주의와 맞서게 된다. 그런데 그렇지않아도 이미 많이 역화된 교황의 정치력이 설상가상으로 교황의 아비뇽 유배생활 2명의 교황진영으로 교회가 분열되는 소위 서구 대이교, 그 해결과정에서 나타난 교황권에 대한 공의회 우위주의, 르네상스 시기에 속화된 교황들의 출현으로 더욱 약화되고 교황이 위신이 말할 수 없이 떨어지게 된다.
정신생활과 종교생활에서는 중세를 지배한 객관주의 대신 개인주의, 주관주의적 의견과 판단이 강해지면서 그것이 종래의 보편주의를 와해시킨다. 그러한 경향의 위클리프와 후스의 이단은 루터의 종교개혁의 선구자 역할을 하게 된다. 물론 그것은 교회의 폐해에 대한 끊임없는 개혁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결국 교회 안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중세를 종식시킨 것은 정확히 말해서 종교개혁이 아니고 그보다 앞서 이태리에서 시작된 르네상스와 인문주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사에서 종교개혁을 중세의 종언으로 보는 것은 새 시대의 정신인 주관주의가 종교면에서 구체화된 것이 바로 종교개혁이기 때문이다. 중세 말기는 전체적으로 볼 때 가톨릭 정신과 교황의 권위가 더없이 실추한 시기이다.
■ 보니파시오 8세와 필립 4세의 대립
교황권은 독일 호엔슈타우펜 왕가와의 싸움에서 이겼으나 그 수확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는동안 민족국가들이 성장하면서 교황권을 거스려 독립을 요구했다. 최초의 민족국가는 프랑스였다. 프랑스는 루이 성왕 때 왕권이 강화되고 민족국가로서의 기반이 조성되었다. 그래서 필립 4세(별명ㆍ미왕 美王)에 이르러 교황권과 싸울 수 있을 만큼 그 국력이 성장되었다.
그런데 교회에 대한 위험은 이러한 민족주의보다 오히려 교황권 자체에 더 있었다. 즉 교황권이 계속 세계지배를 꿈꾸면서 긴급한 교회개혁을 등한시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 어느때보다도 정치적인 교황보다 종교적인 교황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1294년 매우 정치적인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교황위에 올랐다.
새 교황은 로마 귀족출신의 법학자였다. 그는 종교적인 깊이가 없는데다 권력의식에 사로잡혀 다시 한번 신정정치를 관철시키려 했다. 그런데 그것은 현실을 통찰하지 못한 시대 착오적인 착상이었다. 왜냐하면 이미 시대가 많이 변했을뿐더러 교황권 자체도 그간 많이 손상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보니파시오는 프랑스왕 필립과의 투쟁의 첫 단계로 1296년 프랑스 성직자들에게 부가한 성직자세를 금지하는 매우 격렬한 회칙을 공포했다.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가할때는 사전에 교황의 승인을 얻도록 되어 있었다(1215년 라테란 공의회의 결의). 그러나 필립은 그것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성직자에게 십일조를 요구했었다.
야심가인 필립이 가만히 있을리 없었다. 그는 더 엄격한 반격을 가했다. 교황청에 대한 세금과 함께 모든 금과 은의 국외반출을 금지시켰다. 뿐만 아니라 필립은 저명한 로마법 학자들을 동원시켜 그의 지념인 국왕의 절대권을 지지하게 했다. 국민도 왕을 지지했다.
그러는 동안 1300년을 맞이했다. 보니파시오 교황은 이 해를 처음으로 성년으로 선포하고 성년전대사와 함께 로마순례를 호소했다. 매일 외국인 순례자가 20만에 이를만큼 대성황을 이루었다.
아마 이런 성공이 교황에게 다시금 반격을 가할 용기를 일으키게 했는지 모를 일이다.
어쨌든 교황은 1301년 다시 반격에 나섰다. 이번에는 필립에게 회칙을 통해 로마에서 열릴 예정인 공의회에 출두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대해 필립은 교황의 회칙을 위조하여 교황을 거스려 국민을 격분시키고 또 국회로 하여금 그를 지지하는 결의를 하게했다.
그러자 교황 또한 즉시(1302) 회칙「우남쌍탐」(Unam Sanctam)과 파문 위협으로 응수했다. 이 회칙은 시대에 뒤진 양검론(兩劍論)을 다시 들고나와 교황에게 모든 사람이 왕까지도 복종해야함을 선언했기 때문에 유명해졌다.
양검론은 이미 본 바와 같이 영권과 속권의 두 칼자루가 다 결국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교황에게 위임되었다고 주장하는 교회 정치이론이다. 이것은 결코 신조가 될수 없고 시대 상황이 만든 하나의 정치원리에 불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위의 회칙은 마치 그것을 신조화한 느낌을 주었다. 이 이론은 벌써 보니파시오의 후임 교황에게서 약화되었고 그후의 교황들, 특히 레오 13세는 다른 관점, 즉 교회와 국가와의 대등 관계에서 그것을 전개시켰다.
필립 왕은 공의회로 응수했다. 즉 그는 공의회를 소집하고 거기서 교황을 이단으로 단죄하기로 결심하고 로마로 떠나는 그의 대신 노가레에게 그 일을 맡겼다. 그런데 노가레는 돌연 군대를 이끌고 아나니의 교황궁에 있던 보니파시오 교황을 밤에 습격하고 감금한 후 교황의 사임을 요구했다. 다행히 교황은 그곳 주민들에 의해 구출되어 로마로 갈수 있었다. 그러나 거기서 얼마 안되어 사망했다(1303.10).
감금되었던 교황은 아나니 주민들에 의해 구출되지만 다른 나라의 국민들은 무반응이었다. 교황의 정치적 세력이 실추되었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이렇게 보니파시오와 더불어 교황권의 우위시대가 끝나고 그와 더불어 교황의 세계지배시대도 종말을 고한다. 프랑스왕권이 교황권의 그와같은 요구를 완전히 소멸시켰다. 뿐더러 교황권을 보호하여 그 정치권력을 소생시킬 수 있는 강력한 제권도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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