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구약성서가 말하는 세계내적 최종 희망에는 어떤 유형들이 있는가?
이 지상의 시간과 공간개념을 뛰어넘는 종말론적 희망이 싹트면서 하느님의 최종적 다스리심의 도래와 더불어 나타나게 될 때의 상황과 그때의 장면에 대한 관념들이 생겨나게 된다. 여기서 문제는 그때에 가서 발생하게 될 구체적 상황묘사에 있지 않고 지금까지 찾아볼 수 없었던 전혀 새로운 장면묘사에 있다. 그러니까 이제까지의 온갖 인간 경험의 장을 뛰어넘는 아주 새로운 변화를 기대하게 된다. 성서에 나오는 사람들은 이렇게 대망한다.
1)유배생활이나 외부세력에 의하여 흩어졌던 하느님백성의 이스라엘의 소집(이사 27, 13: 아씨리아에 유배갔던 이스라엘의 귀환: 이사60, 4b: 바빌론유배생활에서의 귀환: 요엘 4, 1~4: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힌 민족들을 심판하여 이스라엘을 소집함).
2)유일신이신 이스라엘의 하느님만을 경배하도록함. 그분 홀로 온천하에 주님으로 받들어 모셔짐(신명 6, 4~9: 즈가 14, 9~11: 다니 6, 26~28: 마태8, 11: 로마10, 5~15: 11, 25~36: 묵시7, 9~10).
3)하느님이 머무시는 곳으로서의 예루살렘의 재건 이방인들이 모여올 하느님 도성 예루살렘의 재건(이사60, 1-22).
4)멸망한 유다왕국의 재건과 그 영화로움의 회복(이사 26, 1~4: 예러30, 17~22: 호세14, 5~9) .
5)다윗왕권의 재건과 외부권세로부터의 해방(묵시 20, 1~6:20, 7~10:21, 1-22, 5).
이러한 대망, 곧 유대인들이 이 지상 예루살렘과 직결된 세계종말을 기대하는 경향을 오늘날 까지도 그들안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 하겠다(시오니즘 등).
4. 유대교가 내거는 저승에의 희망은 무엇인가?
유대교가 위에서 살펴본 세계내적 최종희망뿐 아니라, 또한 언제나 인류역사를 초월하는, 이 세상의 시간과 공간적 차원을 뛰어넘는 저승에 희망을 걸고 있음이 확실하다. 랍비들의 문헌에도 장차 다가오는 세계가 이 지상에 바탕을 둔 모든 최종희망을 초월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다(Pesk22, 3에「신랑의 귀한에 대한비유」가 소개된다).
미쉬나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이 세상은 마치 다가올 세계에로 이끄는 대시실과도 같다. 그러니 잔치연회실에 들어갈 수 있기 위하여 대기실에 있을 때에 잘 준비하시요(Av14, 16). 이같이 유대교안에 널리 자리 잡고 있는 랍비들의 견해에 따르면 「이 세상안에서는」온갖 불의, 압제, 곤궁 그리고 죽음이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다가오는 세상안에서는」죽음도 고통도 없으며 불의도 존재하지 않고 억누름과 미움 또한 자리 할 수 없다. 거기에는 오로지 하느님의 사랑과 완성되어 썩지 않는 인간행복만이 존재할 뿐이다. 바빌론 탈믇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장차 다가올 세계에는 먹는 것도 없으며 마시는 것 또한 없다. 다만 외로운 이들이 머리위에 승리의 관을 쓰고 앉아서(하느님)현존하심의 광채 앞에 기뻐 용야할 뿐이다(bBer17a). 현금의 이 지상역사와 장차 다가올 저 세상 사이에 랍비들의 시대의 막이 올랐다. 이들 랍비들의 대가 바로 메시아를 대망하는 메시아의 시대이다.
5. 신약성서가 말해주는 세계종말은 무엇인가?
예수의 복음 선포에서 드러나는 세계종말은 곧 『하느님의 궁극적인 다스리심』이라고 규정할 수 있겠다. 이점이 마르1, 14~15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습니다. 여러분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그런데 그분의 나라는 현재와 미래 두가지 측면을 동시에 점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곧 한편으로는 지금 이미 다가와 있는 그분의 나라를 강조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앞으로 다가올 나라를-완성될 궁극적인 그분의 다스리심을-지향하고 있다. 그러니까 마르1, 15에 따르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런 점은 마르9, 47에서 더욱 명백히 표현되고 있다. 『또한 당신의 눈이 당신을 걸려 넘어지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내던지시오.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는 애꾸눈으로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편이 당신을 위해 낫습니다』. 이같이 「하느님나라」로 들어가는 것이 바로(영원한)「생명」에 도달하는 것과 같다는 사실이 마르9, 43~45에서 거론되고 있다.
위에서는 마르1, 15을 바탕으로 하여 이미 이 세상 한가운데 도래한 「하느님의 다스리심」을 강조했다. 그러나 신약성에서는 그와는 대조적으로 그분의 오심/그분의 나라/그분의 다스리심은 신비에 둘러싸인 것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마태 24에 따르면 세상종말이나 「인자의 재림」시기를 어떤 사람도 예견할 수 없으며 계산해낼 수도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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