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최석우 신부를 비롯 사학자, 사회학자들은 『명동성당은 한국가톨릭교회의 중심이며 상징일 뿐 아니라 한국사회의 얼굴이며 중심적 위치에 있다』고 지적하고 『특히 명동성당은 서구문화 유일지로서의 중요성과 함께 70년대에 이르면서 한국 민주주의의 보루이며 상징으로 굳건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고 강조했다.
1898년 성당 축성식 이후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더불어「종현대성당」에서「명동대성당」으로 개칭된 명동성당은 대성당 설립과 함께 서구문물의 유입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정치ㆍ사회적인 소용돌이의 중심에 자리해 왔다.
특히 해방 이후 본격적인 정치무대로서, 또 문화공간으로서의「상징」적인 존재로 부각돼 있는 명동성당은 정치, 사회적인 측면에서 파란만장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해방 이전부터 일제에 의해 대성당 제대의 전면에 있는 철제난간이 강제철거, 징발되는 비운을 안고 있는 명동성당은 6ㆍ25발발과 더불어 성당건물 전체가 북한 인민군에게 완전히 점령당하면서 성당지하순교자 묘역에 안치된 성인의 유해가 수색당하는 등 민족의 수난과 궤를 함께 하고 있다.
해방 이후 상해 임시정부 귀국 환영식 장소, 미군 환영 장소로 사용되는 등 정치, 사회의 중심지로 부상한 명동성당은 특히 70년대 유신 이후 80년대까지 정치적 암흑기에 인권운동ㆍ사회정의운동의 중심지이며「한국 민주화의 산실」및「도피처」의 상징으로 교회 내외에 잘 알려져 있다.
특히 명동성당의 이같은 민주화의 산실 및 도피처의 역할은 혹독한 정치적 암흑기에 다른 어떤 단체에서 하기 힘든 상황에서 교회가 과감히 그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에서 더욱 가치있는 일로 평가되고 있다.
명동성당이 「민주화의 성지」로 이름 붙여지기 시작한 것은 76년 3월 1일 3ㆍ1절 미사후 「민주 구국 선언문」을 발표한 「3ㆍ1명동사건」.
물론 이에 앞서 지학순 주교 사건 이후 기도회를 비롯 각종 사회정의운동과 노동ㆍ농민운동이 있어왔고 75년 2월 6일 정의구현사제단을 중심으로 한「인권회복 및 국민투표 거부」운동이 있었으나, 명동성당이 민주화의 산실역을 맡게된 것은 76년 3ㆍ1명동사건으로 보는 것이 지배적이다.
「3ㆍ1 명동사건」은 76년 3월 1일 오후 6시 명동성당에서 7백여명의 신자들이 참례한 가운데 20여명의 사제 공동집전으로 3ㆍ1절 기념미사를 봉헌하고, 함세웅 신부, 김승훈 신부, 장덕필 신부를 비롯 7명의 사제와 개신교 성직자 및 재야인사들이 서명한 「민주 구국 선언문」을 낭독, 이들이 모두 구속되면서 발생했다.
이 사건은 3월 15일 저녁 6시 명동성당에서 주교 3명과 2백여명의 사제들과 2천2백여명의 신자가 참석한 가운데 「구속된 사제를 위한 미사」와 「주교단의 명동 3ㆍ1절 기도 사건에 대한 성명」으로 이어지는 등 교회가 민주화 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서는 직접적인 계기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3ㆍ1명동사건과 관련 발표된 이 주교단의 성명은 한국천주교회가 사회정의와 노동자의 인권신장을 위해 발표한 최초의 성명인 68년 2월 9일「강화도사건에 대한 주교단 공동성명」이후 10번째이면서 명동성당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첫 공동성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명동성당은 76년「3ㆍ1사건」이후 본격적인 한국민주화의 본산으로 자리잡은 사건은 87년 서울대생 고(故) 박종철군 고문치사규탄대회이며 △87년 2월 28일~3월 8일 조국민주화와 통일을 위한 구국 9일기도△87년 6월 20일~28일 고(故) 박종철군 고문치사 은폐사건 규탄 법국민대회 및 국민대행진 △88년 5월 15일 제8기 광주민주화운동 추모제중 명동청년연합회산하「가톨릭민주화연합회」회장 조성만(요셉)군의 교육관 옥상서『한반도통일 및 미군축출』구호후 항복 투신 △89년 5월 25일~6월 10일 고 이철규 고문살인 진상규명과 광주학살 원흉「전두환ㆍ노태우」처단을 위한 전국대학생연합회 단식농성 △91년 5월18일~6월 29일까지 고 강경대 대필사건으로 연루된 강기훈 등 전민련 농성 등이 있다.
그밖에 크고 작은 인권 및 정의 관련 사건들과 급기야는 소규모 단체들의 이권과 관련된 시위까지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이에대해 현재 명동본당 수석 경갑실 신부는 『명동성당은 한국의 정치ㆍ사회가 암흑기였던 70~80년대에 민주화의 온상으로 자리잡아왔다』고 지적하고 『고통받고 피해당하는 모든 이를 위해 항상 성당을 개방하면서 복음화에 이바지해 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각종 민주화의 본산일 뿐 아니라 억압받는 자들의 보금자리로 「상징」돼 오던 명동성당이 90년대에 접어들면서 민주화운동의 중심점 역할로서의 빈도가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현상은 6공화국이 들어서면서 가시적으로 자신들의 의견을 표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고, 또 성당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의견 표출이 가능해지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에 대해 경갑실 신부는 『정치적 암흑기와 민주화의 과정에서 교회만이 할수 있었던 역할이 있었다』면서 『이제는 대부분의 단체 및 개인이 자신의 목소리를 다양하게 내고 있으므로 교회는 교회 본연의 일을 찾아서 나아가야할 상황』이라고 말했다.
명동성당이 신자는 물론 일반인들에게 「민주화의 성지」로 이름붙게된 이면에 70~80년대 명동성당에서 사목한 역대 본당 신부들의 역할을 간과할 수 없다.
특히 88년 조성만군 사건 당시 주임으로 재직했던 정의채 신부를 비롯 양권식 신부, 경갑실 신부 등 대부분의 역대 본당 신부들이「중재자」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다.
87년부터 90년까지 최근 4년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일어난 각종 시위와 점거농성 건수를 살펴보면, 성당의 행사 등에 지장을 초래한 경우가 87년 시위32건과 점거농성 5건, 88년 시위 31건과 점거농성 5건, 89년 시위 28건과 점거농성 6건, 90년 시위7건과 점거농성 2건 등으로 87년부터 89년까지 평균1.6주만에 한번꼴로 시위가 발생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같은 과정속에서 성당측이 △성전 보존문제 △전례분위기 훼손문제 △각종성당내 시설 파손문제 △성역분위기 훼손문제 △성모동산 기도분위기 파괴 및 수목 관리의 어려움 △신자 및 차량 성당 통행 장애 △계성국민학교 및 계성여고수업 장애 등을 이유로 성당 개방을 거부한 경우도 있어 「민주화의 성지」라는 측면에서 아쉬운 점을 남기기도 했다.
이제 명동성당은 70~80년대에 맡았던 인권ㆍ정의 등 관련한 민주화 과정의 중요한 몫과 마찬가지로 90년도에도 새로운 얼굴로 한국교회는 물론 한국사회에 중요한 역할을 하도록 요청받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교회 내적으로 볼때 성지로서의 성전보존을 비롯 한국교회의 모본당, 한국교회 성전의 전형으로서의 어떠한 역할을 해나갈 것인가 하는 점을 커다란 숙제로 안고 있다.
더욱이 서울대교구가 92년도 사목지표를 「2000년대를 향한 복음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가운데 서울대교구의 주교좌인 명동성당이 사회속에서 교회역할을 해나가는 선두주자로서의 역할이 기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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