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황의 아비뇽 정착(1309-1377)
교황이 로마를 떠나 프랑스 남부 론느강변의 아비뇽에서 70년간 마치 포로처럼 갇혀 살았다고 하여 역사에서는 일찌기 이스라엘 민족이 바빌론에서 70년간 포로생활을 한 사실과 비유하여 종종 「교황의 아비뇽 유수(幽囚)」로 표현한다. 그러나 적절한 표현인 것같지 않아 「정착」이란 말을 써보았다. 물론 이 말 역시 적절한 표현은 될 수 없다.
교황이 아비뇽에 정착하게 된 데에는 주로 두가지 원인이 있었다. 즉 하나는 로마 정세의 불안이고 또 하나는 프랑스의 압력이었다. 로마의 정치적 불안은 이미 13세기후반에 15명의 교황으로 하여금 로마를 떠나게 했었다. 1303년 보니파시오 8세의 후임으로 선출된 교황 베네딕도 11세도 로마 귀족들이 교황파와 반교황파로 갈라져 다시 정치싸움을 하게 되자 로마를 떠나야 했고 거기서 미구에 사망했다.
한편 프랑스는 국왕 필립 4세가 보니파시오 교황을 거스려 싸워이긴 것처럼 그간 강력해진 국력과 더불어 교황에 대한 압력 또한 거세어지게 되었다. 그결과 프랑스인 추기경 수가 증대하면서 마침내는 1305년 프랑스인 교황이 선출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새 교황은 자신을 글레멘스 5세로 명명하고 아예 로마로 갈 생각은 하지 않은채 리용에서 착좌식을 거행하고는 계속 프랑스에 머무르다가 결국 1309년 아비뇽시에 정착하고 말았다. 이어 6명의 프랑스인 교황이 계속 아비뇽에 체류하는 동안 아비뇽시를 매입하여 그곳에 거대한 교황궁을 건립하고 교황청을 차림으로써 로마귀환을 점점 더 어렵게 만들었다.
아비뇽은 프랑스의 영토는 아니었다. 그러나 프랑스 영토에 둘러싸여 있었으므로 자연 프랑스의 압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아비뇽의 교황들은 프랑스 왕권의 정치 도구 노릇을 하게 되었다. 특히 글레멘스 5세의 굴복은 가장 굴욕적인 것이었다.
당시 프랑스왕은 교황 보니파시오 8세를 패배시킨 바로 필립 4세였다. 그는 이 교황에 대한 복수심에서 글레멘스 5세에게 선임교황을 재판하고 또 그가 자기를 거스려 반포한 모든 회칙을 파기할 것을 요구했다. 허약한 글레멘스는 결국 왕에게 굴복하고 보니파시오 8세의 모든 회칙을 취소했다.
나아가서 글레멘스는 성전기사 수도회의 해산을 요구하는 왕의 압력에도 굴복했다. 이 수도회는 십자군 이후 프랑스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그간 굉장히 부유해졌고 그래서 비난과 중상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필립은 바로 그 점을 이용하여 이 수도회를 폐지시키기로 결심하고는 수도자들을 이단자로 몰아 모두 체포하여 고문을 가하고 심지어 화형에 까지 처하게 했으며 재산을 모두 몰수하게했다(1307). 교황 글레멘스는 국왕의 이같은 잔혹한 행위를 묵인했을 뿐더러 그들의 이단의 혐의를 인정하고 1312년 비엔느 공의회에서 성전기사 수도회를 정식으로 폐지, 해산시켰다.
다음 교황 요한 22세는 또다시 독일왕과 충동을 일으켰다. 그 주요 동기는 물론 교황의 신정정치를 관철시키려한데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프랑스 국가와 왕권에 영합하려는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이기도 했다. 대립은 교황 요한이 바이에른의 루드비히 왕에게 폐위를 선고한데서 비롯되었다. 이유인즉 그의 왕 당선은 교황의 승인이 없었으므로 무효하는 것이었다. 루드비히는 즉시 반격을 가했다. 그는 이제 교황이 아니라 교황권 자체를 공격하고 나섰다. 독일교회도 왕을 지지했다. 무엇보다도 오캄과 파두아의 마르실리오 같은 저명한 학자들이 왕편에 서서 함께 투쟁했다. 이를 위해 마르실리오는 교황직에 대한 공격문까지 작성했다. 여기서 교황권의 신적(神的)기원과 함께 공의회에 대한 그 우위성이 부인되었다.
독일의 반격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루드비히는 또한 교황을 이단자는 선언하고 니콜라오 5세를 그의 대립교황으로 내세웠다. 또 그의 선제후(選帝候)들은 렌제의 모임에서 이후 그들이 선출한 왕이 교황의 승인을 받을 필요가 없음을 결의했다(1338). 이로써 그때까지 교황이 독일 황제를 후견해온 특권이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 아비뇽의 교황들
아비뇽에 거처한 7명의 교황에 대한 평가는 일반적으로 부정적이다. 물론 개중에는 신심이 깊고 덕행이 뛰어나고 복음전파에 열을 올린 교황들도 있었다. 예컨대 요한 22세는 근동과 아세아 지방의 포교를 촉진했으며 베네딕도 12세는 개혁교황으로 불릴만큼 교회의 폐해를 개혁하는데 적지않게 공헌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때 그들에게는 밝은 면보다는 어두운 면이 컸다.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프랑스 왕권에 너무 매여있었다는 사실 외에도 과도한 재정적 요구와 족벌주의로 교회를 중대한 위기에 처하게 했다.
아비뇽의 교황들은 부족한 재정을 메우기 위해 성직록을 더 없이 남용했고, 선불과 수수료를 요구하고, 징벌과 파문으로 위협하는등 그야말로 묘안을 짜내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물론 교황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그러나 화려한 교황궁을 건립하는 등 쓸데없이 재정을 팽창시켜 놓은 것이 더 문제였다. 어쨌든 세금의 지나친 요구는 교회를 불안케 하고 전반적인 격분을 일으켰다.
친족을 등용하는 이른바 족벌주의는 교회의 명성을 더없이 더럽혔다. 글레멘스5세와 요한 22세가 심했다. 당시 9명의 프랑스 추기경 중에는 글레멘스의 조카가 4명이나 있었다. 그래서「조카 추기경」이란 날말까지 생겨났을 것이다.
아비뇽 교황 중에서 로마 귀환을 생각하지 않은 교황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지연되자 교회 안에서 로마귀환을 요구하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특히 스웨덴의 비르짓다 그리고 시에나의 가타리나 두 성녀는 교황에게 로마귀환을 간절히 호소했다. 이리하여 그레고리오 11세에 이르러 1377년 로마 귀환이 실현되었다. 그러나 그가 다음해 사망하자 교회가 두 교황으로 갈라지는 더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다.
70년간의 교황의 아비뇽 체류는 교황의 위신과 그 보편성을 말할 수 없이 손상시켰다. 이것이 다음의 서구 대이교의 전제 구실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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