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신학생 시절에 공부를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제일 재미 없는 공부가 신학 공부라고 생각했습니다. 신부가 되고 싶으니까 어쩔 수 없이 강의는 듣지만 항상 아리송하기만 했습니다. 분명한 결론이 나지 않으니까 재미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교수 신부님들은 한 학기동안 열심히 강의하신 다음 마지막에는 하나같이「신비다!」하시고는 종강했습니다. 그 중에도 특별히 삼위일체에 대한 강의는 진작부터 결론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재미도 없고 공부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리고는 나도 교수하면 잘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엇이나 한 학기동안 얘기 하다가 마지막 시간에「신비다!」하면 되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신비다」하는 말은「모른다」하는 말이 아닙니까? 그래서 몰라도 강의할 수 있는 것이 신학인 것 같았습니다.
신학은 하느님께 대한 학문이 맞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가르쳐준 것이 문제입니다. 따라서 신학은 정확하게 말해서 하느님이 인간에게 가르쳐준 것을 공부하는 학문입니다. 인간에게 인간들이 알아듣도록 가르치자니 인간의 언어를 사용할 수 밖에 없고, 그러다보니 인간들은 자꾸 자기식대로 알아들으려 하고, 이제 학자들끼리 논쟁이 생기고 혼란이 생기고 이단이 생겼습니다.
「삼위일체」란 말도 하느님이 하신 말이 아니라 인간들이 만들어낸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에 대해서 여러가지로 설명이 필요한데, 설명하는 말도 인간의 말이라 점점 복잡하고 개념은 혼미해집니다.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을 구태여 구분하지 말고 그저 하느님이라 부르면 그만인 것을… 하느님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하느님이 인간이 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느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살게 해주신다고.
그런데 오늘 성경에서 예수님은『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다 나의 것이다. 그래서 성령께서 내게들은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시리라고 내가 말했던 것이다』(요한 16, 15)라고 말씀하셨기에, 도대체 이분들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사람들이 모든 지식과 언어를 다 동원하여 따지다 보니 「삼위일체」란 결론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인간의 이치대로는 설명을 할 수도 알아들을 수도 없게되자「신비다」하면서 무조건 믿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우리에게 해주시는 말씀의 의미는 알아들어야 합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 우리 구원에 무슨 유익이 있길래 우리가 대축일로 지내는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물론 대축일로 지정한 것은 교회가 정한 것입니다. 하느님에 관한 것이라 사안은 중대하고 알아듣기는 불가능하며 믿기도 어려우니 모든 신자들이 거부감 없이 믿게하는 방법으로 대축제를 지내게 한 면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축제를 지내는 모든 공동체는 그 공동체의 이상(理想)을 삼위일체에다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장 생각나는것은 크리스찬 가정입니다. 부부는 서로 다른 개체로 남아있으면서 둘이 한몸을 이루고 살아 갑니다.
나는 가끔 실수를 합니다. 한번은, 남편에게 부탁한 일을 부인에게 물어봤습니다. 부인은 금시초문이라더군요. 그래서 내가 따지다 보니 그 부인의 남편에게 부탁한 거였습니다. 얼마나 미안했던지! 하지만 그 착각의 책임은 그 부부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 사람을 혼동할만큼 훌륭하게 일치된 부부였기 때문입니다.
나는 수녀들의 이름과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 합니다. 그저 그 얼굴이 그 얼굴입니다. 한데 꼭 같은 제복을 입었기 때문만은 아닐것입니다. 같은 분위기에서 살아가는 공동체적 일치의 생활이 우리에게 혼동을 일으키게 한다고 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우리게 말해준 의도는 분명합니다. 이를 표본으로 삼아 사랑으로 서로 일치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강한 자는 약한자를 해치지말고 대등한 관계에서는 서로 대결하여 분열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현대 세계를 살아가는 소위 문화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 보다 문화인 행세를 한다고 생각 합니다. 자녀가 생각에 세번째 자식은 뱃속에 있을 때 반항하지 못한다고 병원에 가서 죽여버리기를, 또 부부들이 함께 살기 힘들다고 법원에 가서 이 혼장에 도장 찍어버리기를 너무 쉽게 하고 있습니다.
가정 안에서의 삶의 태도가 이럴진대 어떻게 사회생활에서 공동체적 일치를 우선으로 둘 수가 있겠습니까? 또 재미있는 일은 병원과 법원에서 일하는 분들이 이 세상에서 존경 받고 가장 훌륭한 사위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교회도 일치의 표지로 내 세운 삼위일체교리때문에 이단이 생겨 갈라진 교회역사도 세상일이라 그렇게 되었다고 보면 흥미롭습니다.
아무튼 현대는 삼위일체 대축일을 더욱 성대하게 지내야겠습니다. 현재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은 역사적으로 삼위일체의 교훈을 가장 필요로 하는 시기란 생각을 합니다. 삼위일체 축일에 현재 이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사랑으로 일치하는 세상을 지향하도록 큰 은총을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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