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 서울의 관문이자 외국과의 무역거래 거점으로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어 항상 외국세력들에 의해 주목받아 오돈 인천땅에 천주교 신앙이 전래된 것은 한국천주교회의 창설과 함께 시작될 만큼 긴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로 북경에서 영세한 이승훈(베드로)이 참수당하여 묻힌 곳이 바로 인천의 외곽지인 장수동 반주골이며 이승훈의 아들인 택규와 신규가 살았고 참수된 후 안장된 곳도 이곳 반주골로서 인천은 한국천주교회사와 함께 하면서 천주교와는 깊은 연관이 있는 곳이다.
뿐만 아니라 1801년에 발생한 신유박해의 상황과 당시 한국교회실정을 북경주교에게 알리는 탄원서인 「백서」(帛書)를 작성, 체포돼 순교한 황사영(알렉산델)이 태어나고 유년기를 보낸 곳이 인천교구 관할지역인 강화읍 월곳리 대묘동인것으로 보아 현재 기록에는 자세히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인천땅에는 비교적 일찍 복음이 전래돼 한국교회역사와 함께 맥을 같이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신앙의 뿌리가 깊은 인천땅에서 청주교구장 정진석 주교(부평2동본당 출신)와 대전교구장 경갑룡 주교(소사본당 출신)를 비롯해 많은 성직자ㆍ수도자가 배출된 것은 당연한 일로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많은 성소자를 배출하기까지는 이 지역 순교자들의 숭고한 신앙심과 이를 본받으며 살아온 이곳 신자들의 깊은 신심을 간과할 수 없다.
특히 인천지역의 수많은 순교자들 중 1839년 서소문밖에서 참수치명한 김성임(마르타)은 부평출신으로 지난 1984년에 성인품에 올랐으며, 양반집안에서 태어나 영세입교한후 냉담자회두와 회장으로서 교회의 궂은 일을 도맡아 했던 민극기(스테파노) 성인도 이곳 인천사람이다.
그러나 1839년 기해박해가 발생할 무렵을 전후하여 인천에서도 신앙의 뿌리가 더욱 튼튼하게 내리기 위해 모진 시련을 겪어야만 했는데 1838년 10월경에 인천의 정바오로라는 사람이 천주를 공경하기 위해 조상의 위패를 부숴버린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당시 인천에 살고 있던 50여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뿔뿔이 흩어졌는가 하면 그중 12명가량의 신자들이 체포돼 옥에 갇혔다는 사건이 전해지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을 근거로 할 때 한국교회 창설 초기부터 계속된 박해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인천지역에 천주교 신앙이 면면이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고 더군다나 이 지역 출신인 이승훈과 황사영 등이 천주교신자였기에 수많은 고통을 당하고 처형되었음을 잘 알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이승훈의 영세후 50여년이 지났을 무렵, 60여명이상의 천주교신자가 인천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운 사실이다.
특히 1866년부터 시작된 대원군의 박해는 미국ㆍ프랑스 등의 함대가 인천 앞바다에 나타날때마다 되풀이 된 것으로서 그만큼 인천지역이 나라의 관문으로서 중요했을 뿐만 아니라 김대건 신부 체포 이후 천주교신자들에 대한 감시가 심해졌음에도 불구, 백령도 근해를 통해 랑드르 신부 등이 한양으로 출입하는 등 많은 선교사가 왕래했던 신앙의 관문으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실 인천지역에서의 선교활동에 대해서는 1866년 병인박해때 베르뇌 주교가 부평지역등지에서 성사를 베풀기 이전까지 선교사들이 전교활동을 한 기록이 전혀 없는데, 그런데도 부평ㆍ통진ㆍ영종 등 여러곳에서 신앙촌을 형성하여 많은 신자들이 암암리에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침내 1883년 1월에 일본의 집요한 강요에 의해 인천이 개항되고 1886는 한불조약체결로 개항지에서의 선교사들의 거주가 허용되자 당시 블랑 주교는 개항지에서의 활동 및 인근지방의 전교를 위해 개항지에 본당 창설을 위해, 심혈을 기울이던 중원산에 이어 상업이 번창하고 개항지 중 수도의 관문이라는 점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던 제물포에 본당을 설립키로 결정하고 빌렘 신부를 인천지역 담당신부로 임명한 후 1889년 7월에 빌렘 신부가 부임함으로써 인천지역에서 처음으로 제물포본당(현 답동주교좌본당)이 창설됐다.
1889년 당시 신자수는 한국인 59명, 일본인 25명 등 84명이 있었는데 신자들은 특별히 한곳에 모일 장소가 없었으며 인천신자들에 대한 차별. 폭동으로 인해 성사생활도 제대로 할 수 없었으나 신앙만은 견고했었다.
이 같은 굳건한 신앙을 바탕으로 인천 답동본당 관할 공소로 출발, 인천지역에서 두번째로 1952년 본당으로 승격된 부평2동본당(창설당시 부평본당)은 현재 청주교구장인 정진석 주교를 비롯 18명의 성직자와 많은 수도자를 배출시켰을 뿐아니라 현재 4명의 신학생이 수학중이어서 명실공히 인천교구의 성소의 온상으로 그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그러나 부평2동본당의 역사는 다른 교구의 많은 성소자를 배출한 역사가 오래된 본당보다 비교적 짧은 40년이지만 짧은 역사에도 많은 성소자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초대본당주임인 김영식(베드로) 신부를 비롯 역대 주임신부들이 한결같이 자율적인 분위기속에서 신학생들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왔던 것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따라서 부평2동본당 신학생들은 방학중의 생활이 본당내 활동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고 공장에서 근로자로 또는 사회시설 등에 종사하면서 가난한 삶을 배우며 소외된 자들의 애환을 몸소 체험하는 등 사회생활체험을 풍부히 할 수 있어 사제가 된 후에도 본당사목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부평2동본당은 일제시대 조병창에서 근무하던 직원과 노무자증 신자들을 위해 모임을 주선한 것이 계기가 되어 1941년 12월 28일 서울교구 인천 답동본당의 관할 공소로 설정되면서부터 본당역사의 첫 출범이 시작됐다.
1952년 3월 본당으로 승격한 부평본당 초대주임 김영식(베드로) 신부는 고아구제사업에 남다른 정성을 보이면서 동시에 신학생 양성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황해도 연백군 연안본당주임때 고아원을 세워 고아들을 돌보던 김영식 신부는 한국전쟁중에는 부산에서 그리고 부평에서 고아원을 돌보고자 성모원을 설립하는 한편 성모자애병원을 세워 지역사회발전에도 많은 공로를 남겼다.
신학생시절 몸이 자주 아파서 고생했던 김신부는 사제서품 당시 하느님께『사제가 된후에 신학생 양성비를 다른 사람보다 두배이상 내고 또한 내 힘으로 두명 이상의 사제를 키우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었는데 김신부가 신학교에 보내서 사제가 된 이는 정진석 주교와 김신부의 조카인 김영일 신부(현 서울 둔촌동본당주임)이며 그외 김신부가 주임신부로 재임할 당시 서품된 이는 이창호 신부(대구 대봉본당주임)와 이정규 신부(원주교구)로서 성소못자리형성에 지대한 심혈을 기울인 것으로 주목받고 있다.
당시 고아구제사업을 펼치던 김영식 신부의 통역관으로 활동했던 정진석 주교는 『미군부대의 도움을 얻기 위해 김신부님의 영어통역을 위해 부평에 왔던 것이 계기가 되어 김신부님의 영향으로 신학교에 들어가게 됐다』면서 『김신부님의 성소자계발에 대한 열정을 고아사업 못지않게 매우 높았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김신부의 성소자계발에 관한 열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부평2동본당 출신인 노동한ㆍ장희영ㆍ이준희 신부의 1973년 사제서품 당시 본보에 보도된 기사를 보면 자세히 알 수 있다.
「이번 인천교구에서 새 사제가 된 4명중 3명이 부평2동 출신이다. 새사제 노동한(분도), 장희영(시몬), 이준희(마르꼬)등 세 신부는 성신고등학교 입학때부터 9년동안 동고동락한 형제신부이기도 하다. 이들 세 신부는 부평2동본당 초대주임이었던 고(故) 김영식 신부의 남다른 성소권고에 힘입어 이들 3명은 함께 결심 …성신고등학교에 입학했다」(본보 1973년 12월 16일자 참조).
이처럼 김신부의 사제양성에 대한 관심과 노력이 대단했었음을 잘 말해주고 있다.
또한 강성욱(마태오) 신부의 재임시에는 6명이 신학교에 입학하기도 했는데 강신부는 국내에서는 최초로 1984년에 가르멜산 성체회를 도입하여 본당신자들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성체조배를 하도록 했는데 지속적인 성체조배 결과 신자 개개인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더욱 확고히 다지는 발판을 마련해 주는 한편 성체신심을 돈독히 해주었으며 현재 지속적인 성체조배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돼 수많은 본당에서 활발히 실시되고 있기도 하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부평2동본당은 신학생들의 본당생활은 본당내의 활동에만 얽매이게 하지않고 자율적인 생활을 하도록 권장하고 있음이 특징적이다.
부평2동본당 주임 황상근(베드로) 신부는 『성소는 마지 못해서 즉 실력 때문에 신학교를 선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면서 『성소는 가치있는 두가지 중 더 가치있는 것을 선택할 때 큰 의미를 가진다』고 강조했다.
황상근 신부는 또 『현재 신학교의 생활이 그렇게 자율성이 많지않아 사회경험을 하기에 매우 힘든 상황이다』면서 『신학생들이 성소를 지키고 키워나가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좀 더 폭넓고 자유로운 생활방식이 필요하며 신학생들로 하여금 사회경험을 풍부히 쌓도록 해 현 사회경험을 풍부히 쌓도록 해 현 사회실정에 맞는 사목자양성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현재 부평2동본당 신학생들은 공장에 취업하거나 또는 본당에서 막노동이나 힘든 일을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가난정신을 몸소 체험하면서 가난한 이들의 애환을 배우고 모든 신자들이 필요로하는 사목자가 되겠끔 노력하고 있다.
현재 부평2동본당은 성소후원회를 중심으로 매월 한차례 회합을 가지면서 성소자계발 및 후원에 물심양면으로 정성을 쏟고 있는데 신학생들과 신자들이 함께 모여 대화의 장도 마련하고 있다.
그러나 보다 폭넓은 성소후원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본당 전신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중요함을 인식한 본당성소후언회는 이를 위해 전신자의 성소후원회원화를 위해 적극 추진할 방침이다.
현재 확인된 부평2동본당 출신 성직자는 다음과 같다.
▲이창호(대구 대봉) 이정규(원주교구) 정진석 주교(청주교구장) 김영일(서울 둔촌동) 노동한(석암) 이준희(주안3동) 장희영(심곡3동) 최상진(송림동) 조호동(삼정동) 박유진(답동) 한세만(용현) 김성범(부평5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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