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메나는 메나스(Menas)로도 불린다. 285년 이집트 멤피스 근처 니세우스라는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유피미아는 자식이 생기지 않자 성모 이콘 앞에서 아들을 주시기를 눈물로 기도하고 있었는데, 그 이콘으로부터 ‘아멘’이라는 소리를 듣고 나서 메나를 낳았다.
메나는 15살에 로마군대에 입대해 프리지아에서 복무하고, 3년 후 자신의 전 생애를 그리스도께 바치기를 서원하며 사막으로 나갔다. 이후 디오클레티안 황제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할 때 코티에움에서 체포돼 고문당한 후 목이 잘려 순교했다.
메나를 처형한 병사들은 3일 동안 그의 시신을 불태웠지만 그의 시신은 조금도 타지 않았다. 그 후 메나의 여동생은 군인을 매수해 그 시신을 배에 싣고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모셔 두었다.
박해가 끝났을 때, 천사는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 총대주교에게 나타나 성 메나의 시신을 낙타에 실어 리비아 사막으로 나가라고 했다. 사막으로 나가 마리아트 호수 끝 어느 지점에 이르자 성인을 실은 낙타가 멈추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것을 하느님의 표시로 생각해 그곳에 성 메나의 시신을 묻었다.
이후 몇 년이 지나 로마 총독이 성 메나의 시신을 알렉산드리아로 옮기려 했다. 그러나 성인의 관을 실은 낙타는 무릎을 꿇고 움직이지 않았다. 관을 다른 낙타로 옮겼지만 두 번째 낙타도 움직이지 않았다. 총독은 마침내 이것이 하느님의 뜻임을 깨닫고 포기했다. 세월이 지나 성인의 시신의 위치는 잊혀졌다.
5세기 초반, 비잔틴 황제 제노(474~491)에게는 나환자 딸이 있었다. 어느 날 밤 그 소녀에게 성 메나가 나타나 자신의 시체가 묻힌 곳을 알려 주었다. 다음날 그녀는 완치됐고, 자신이 전날 본 환시를 아버지에게 말했다. 제노 황제는 즉시 성 메나의 시신을 찾고 리비아 사막의 국경 지대에 대성당을 짓도록 했다. 이후 그곳은 카룸 아부 미나라는 큰 도시로 발전했으며, 다양한 질병을 치유하고자 하는 이들이 많이 몰려 들었다. 그는 동방정교회와 콥트정교회는 물론 로마가톨릭에서도 모두 공경 받고 있다.
이번에 소개한 이콘은 6세기 말 어느 무명의 이집트 장인이 그린 ‘그리스도와 수도원장 메나’란 성화다. 오른쪽에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에서는 후광과 십자가가 보인다.
그는 복음서를 왼손에 들고 오른손으로는 다정한 친구처럼 수도원장 메나(AD 285~309년경)의 어깨를 감싸고 있다.
그리스도 후광 오른쪽에는 ‘구세주’(Savior)란 명문이 있으며, 성 메나의 후광 왼쪽에는 ‘수도원장 메나’(Apa Mena Superio)라는 명문이 있다.
장긍선 신부 (서울대교구 이콘연구소 소장)
국내 이콘 분야에서는 최고 전문가로 꼽힌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정교회 모스크바총대주교청 직할 신학교에서 ‘비잔틴 전례와 이콘’ 과정 등을 수학한 후 디플로마를 취득, 이콘 화가로도 활발히 활동해왔다. 1992년 사제품을 받았다.